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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편 :: 2017/03/27 00:07

IPTV로 영화 예고편을 보다 보면
예고편을 본 후 관심이 생겨서 해당 영화를 다 봤을 때
그냥 예고편만 보고 말 것을
이란 느낌이 드는 경우가 제법 많을 듯 싶다.

예고편에 나름 영화의 주요 장면들이 압축되어 나열되고
가장 흥미를 끌 만한 요소를 가지고 예고편을 구성하는 만큼
영화 전체의 서사가 예고편을 압도하기는 어려운 것이고
무엇보다도 영화의 내용에 대한 궁금증이 예고편에 담겨 있다 보니
실제로 영화를 보는 행위는 일종의 허무로 이르는 경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궁금한 것의 가치는
그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는 것에 있다보니 말이다. ㅋㅋ

궁금증을 해소했을 때 어지간한 임팩트가 있지 않고선 궁금증 해소의 짜릿함은 잘 발현되기 어렵다.

궁금증은 그냥 궁금증으로 간직하는 게 가장 최적의 밸류인지도..

그래서 IPTV로 예고편들이 쭉 이어질 때
그 예고편 감상 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나름 합리적인 효용이란 생각이 든다. ㅎㅎ

그래서
예고편은
그 자체로
완결적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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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감 :: 2016/12/21 00:01

물리적 관점에서
나의 삶은 내가 위치했던 좌표와 내가 이동했던 좌표 간 거리로 규정된다.

내가 생성하는 물리적 이동.
좌표와 경로
노드와 링크

그런데..
내가 어떤 좌표에 위치했다는 건
내가 그 좌표를 제외한 나머지 수많은 좌표들을 배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내가 좌표와 좌표 간 이동을 했다는 건
내가 그 이동경로를 제외한 나머지 수많은 이동경로의 가능성들을 선택 선상에서 제외했다는 것을 내포한다.

존재로 삶의 궤적을 형성한다는 건
삶의 궤적을 제외한 다른 영역에 대해서 부재를 태깅하는 것이다.

존재로 살아간다는 건
부재로 비워 두는 곳을 규정하고 그 곳을 부재감으로 채워 나가는 일이다.

존재감은 부재감으로 규정된다.

부재란 무엇일까.
왜 부재하는 것일까.
왜 편재의 틀 속에서 수많은 부재를 생성하게 되는 것일까.

표현과 은닉 사이에서
선택과 배제 속에서
존재와 부재 간을 끊임없이 오가는 것

그게 또 하나의 삶의 궤적일 듯 싶다.

존재와 부재..
그것들은 노드들이고
노드들 간의 보이지 않는 이동경로.

물리적 경로가 아닌
또 다른 차원의 링크

그 링크가 뭔지 알아가는 과정
그것도 또 하나의 이동경로

나의 현재 위치
나의 현재 동선
그것들의 흐름 속에서 나의 부재가 서사로 펼쳐진다.

그리고
그걸 어렴풋이 느끼는 것
그게 부재감이다. ㅋㅋ



PS. 관련 포스트
좌표와 이동
망각과 복원
숨겨진 비밀
비밀코드 해독과 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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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호흡 :: 2016/04/27 00:07

소설을 읽는 걸 좋아한다.
요즘 소설 읽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난 그냥 소설 읽는 게 좋다.

이유가 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면,
사람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것을 묘사해 내는 느낌이 그 안에 있어서 좋은 것 같다.

사람의 삶을 묘사한다는 것.
예전엔 그게 그렇게 크게 와닿지 않았었다.

그런데
시대가 점점 빠른 호흡 속에서 정신없이 흘러가는 양태를 취하게 되면서
느린 호흡으로 한 사람을, 한 장면을 집요하게 묘사해 내는 소설작법의 의미가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을 1분 안에 판단해 버리고
사안을 10초 안에 스캐닝하고 빠르게 댓글을 다는 시대.

한 사람에 대해 충분한 호흡을 갖고 이해해 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한 사안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깊게 통찰해 보려 하지 않는
그런 흐름이 만연하고 있는 시대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소설은 더욱 나에게 매력으로 다가온다.

짧은 호흡만 존재하는
어텐션 결핍의 시대에 소설은 충만한 주의력으로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니까.
그런 소설가의 시선이 좋아서 소설을 계속 집어들게 되는 것 같다.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너무나 좋아진 테크놀로지의 토양 위에서
정작 통찰을 향한 접근성은 현저히 떨어진 상황이 아닐까 싶다.
피상적 접근성은 날이 갈수록 고도화되고 있는 반면
사물과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는 갈수록 희소한 가치가 되어가고 있다면

비즈니스와 기술이 가져다 주는 편리한 일상의 흐름은 과연 어떤 의미인 것일까.
소비자들을 정신 못 차리게 짧은 호흡의 세상 속에 밀어넣고 비즈니스와 기술은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것 아닐지.
그런 흐름 속에서 소비자들은 인간으로 살아갈 시간들을 모조리 빼앗긴 채 시장이 정의하는, 시장에서 의미있는 로봇 소비자로만 기능하고 작동하는 기계적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그런 흐름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가 심화될 수록
소설은 더욱 더 읽어야만 하는 삶의 필수적 자양분이 아닐까.

그런 소설의 위치와 역할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소설을 내 옆에 두고 그것과 친해지려고 계속 눈길을 주는 것인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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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성과 서사 :: 2016/04/25 00:05

포털 뉴스 기사에 달리는 댓글을 보면서 드는 생각.
쉽게 온라인에 접근해서 어떤 사안에 대한 생각을 댓글로 적는 행위란 과연 무엇일까.

온라인, 모바일은 사용자에게 접근성이란 축복을 선사했지만..
너무나도 쉬운 접근성 때문에 정보를 쉽게 얻게 된 대신에
너무나도 쉽게 얻게 된 정보에 대해서 너무 쉽고 빠른 판단을 내리게 되고
그로 인한 부작용이 발생했고, 그런 부작용이 접근성과 상호 증폭 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너무나 쉽게 판단한다는 건
사람과 사안에 내재한 서사를 외면한다는 것이겠고
그렇게 사람과 사안에 깃들어 있는 이야기를 무시하면서
쉽게 사람을 판단하고 사안에 대한 입장을 정하게 되는 것인 듯.

사람을 그 사람이 흘러왔던 긴 시간의 흐름과 그 사람을 둘러싼 360도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순간적, 제한적 관점으로 순식간에 훑어내리고 빠르게 스캐닝해낸 단편적 정보로 쉽게 댓글을 뱉어내는 모습.

과연 그 사람과 사안을 충분히 들여다 보고 충분히 생각했다면 그렇게 쉽게 댓글이 써질 수 있을까.
댓글을 쉽게 배설하고픈 욕망 하나. 그것에만 충실한 플레이. 그 속에서 서사와 이야기는 침잠하게 되는데.

함몰된 서사와 만연하는 댓글.
그 속에서 사람이란 존재는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타임라인 상의 조각난 파편적 스트림 속에 갇혀버리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다. 이제 짧은 시간 안에 파악되지 않고 읽혀지지 않고 보여지지 않으면 의미를 갖기가 어려워지는 세상. 어떻게든 파편 속에 들어가야, 파편적으로 빠르게 스캐닝될 수 있어야 의미를 띨 수가 있는 상황이라면.

나에게 주어진 놀라운 접근성의 축복은 이제 저주라 칭해도 마땅한 것이 아닐까.
접근성이 혁신적으로 증폭된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과연 어떤 것인지.
접근성의 수혜를 누리고 있는 나는 과연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접근성이 공기와도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가는 시대.
그 공기의 의미에 대한 깊은 고민은 점점 희박해져 가는 시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에 대해서 생각하는 이 시간은 점점 소중해져만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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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 확률계산기.. 바둑.. 인간.. 기계.. :: 2016/03/14 00:04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을 보면서 느낀 점.

알파고는 확률계산기이다.
그저, 바둑판의 비어있는 점들에 돌을 놓았을 때 이길 수 있는 확률을 각각 계산할 뿐이다.

바둑은 확률계산 게임이다.
19X19=361로 구성된 각각의 점에 경우의 수를 감안한 확률을 부여하면서 상대방보다 확률계산을 더 잘한 사람이 이기는 게임.

인간은 확률계산기이다.
바둑을 둘 때만 확률을 계산하지 않는다. 매사에 확률을 계산한다. 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나의 뇌 속에선 항상 확률 계산이 수행된다. 지금 무엇을 하면 나에게 이로울 확률이 몇 %인가. 그에 대한 계산을 끊임없이 수행할 뿐이다. 

알파고는 차가운 확률계산기이다. 그리고 방대한 정보처리 역량을 갖고 있다.
감정이 없이, 서사도 없이 그저 최적의 위치를 찾기 위한 계산을 한다. 인간이 계산기보다 숫자 계산을 더 잘할 수 없듯이, 알파고는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연산 능력을 바탕으로 정교한 형세 판단을 한다. 바둑에서 흐름을 읽고 형세를 판단하고 승부수를 띄우는 것이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 생각했지만, 알파고는 그것도 결국 계산의 영역에서 얼마든지 커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셈이다.

인간은 상상한다.
기계는 주어진 데이터를, 방대한 정보를 처리하면서 계산을 한다. 기계는 아직 상상하고 이야기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반면, 인간은 확률계산과 함께 상상도 할 줄 안다. 상상을 하면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 감정의 곡선을 따라 자아와 개성을 표출하고 색깔을 뿜어내면서 자신 만의 서사를 끌고 갈 줄 안다.

인간은 작가이다.
인간은 이야기를 생성하고 이야기와 이야기를 연결하여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모든 인간은 작가이다.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자신 만의 스토리를 써내려간다. 공식적으로 특정 인물에게만 부여되는 '작가'란 타이틀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모든 인간은 작가라는 엄연한 현실을..

단, 스토리텔링조차 계산의 영역으로 포괄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야기라는 건 결국 주어진 정보 기반으로 상상을 하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행위 조차도 결국 존재하는 정보를 기반으로 한다. 기계가 이야기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계산 프레임에 넣게 되는 순간, 기계가 작가의 일을 수행하는 날이 결국은 올 것이다.

인간은 계산기가 되어가고 있다.
확률계산을 하든, 창작을 하든 그건 계산 행위이다. 결국 인간은 계산기에 불과한 존재인 것이다. 알파고가 우리에게 알려준 현실은 매우 간단하게 요약된다. 모든 인간은 계산기에 불과한 존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사실.

인간은 기계를 만들었고, 기계는 인간이 기계에 불과한 존재란 사실을 알려준다. 그건 인간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인간은 원래부터 기계는 아니었다. 기계의 속성을 갖고 있었을 뿐, 기계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로 진화할 가능성을 분명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기계를 만들고 그것에 의지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기계 이상의 존재가 될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고 기계 이하의 존재로 스스로를 규정하기 시작했다. 알파고는 그런 인간 노력의 산물이다. 스스로를 기계 이하로 규정하게 될 수 밖에 없는 프레임 속에 빠진 것이다. 문명은 그런 것이다. 인간 삶의 질을 높이려는 지향점을 갖고 있는 듯 하지만 결국 인간 존재를 격하시키는 흐름을 타고 있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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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파이 :: 2014/07/04 00:04


If your mind were a pie chart, what would it look like?


인간을 단지 정보로만 환원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나를 파이 차트로 규정하면 어떤 형상을 띠게 될까?

요거 꽤 재미있는 놀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파이차트의 단면이 어떤 궤적을 형성하며 흘러가게 될 지도 궁금하고

그 궤적의 총체적 윤곽이 의미하는 것.

궤적을 점으로 환원할 때,

궤적을 선으로 환원할 때,

점과 선은 어떤 면들을 잠재적으로 공모하고 있는 것인지.

나의 마음은 어떤 파이의 서사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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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 2014/06/25 00:05

설득은 일상적 활동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기 전까지의 수많은 활동 중에서 설득이 개입하는 케이스는 무수히 많다. 작은 설득, 큰 설득, 민감한 설득, 가벼운 설득, 우왕좌왕하는 설득, 단호한 설득, 빵터지는 설득, 음습한 설득, 찬란한 설득, 차분한 설득,..  설득은 각양각색의 형상으로 나를 움직이고 통제하고 변화시킨다.

설득이란 관점에서 하루 24시간을 관찰해 보면,
나는 설득에 극도로 피폭된 설득 방사능 오염자이다.  설득에 함유된 방사능 동위원소는 나의 생체 내 다양한 단백질 등과 서로 섞이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유형의 신종물질을 농축 탄생시킨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시도하는 설득
타인이 나에게 시도하는 설득
내가 타인에게 시도하는 설득
내가 대상 없는 무언가를 향해 시도하는 설득
어디선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로부터 나를 향해 다가오는 설득

설득은 360도 전방위로 송신되고 수신되면서 나를 형성한다. 나라는 '원자핵' 주위를 설득이라는 '전자'가 안개처럼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나는 온전히 나일 수는 없고 설득과 함께라야 비로소 원자로 기능할 수 있다.  원자핵은 자신이 하나의 개체라고 오인할 수 있으나 실은 원자핵은 전자에 의해 규정된다.  원자핵이 전자와 맺는 관계의 양상이 원자의 특성을 서술하게 되는데 설득이란 이름의 전자군은 원자핵과 어우러지면서 '원자'라는 존재의 특질을 흐름의 서사로 펼쳐나가게 된다.

원자핵이 전자와의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기능적 특성에만 매몰되어 있으면
원자핵은 영원히 그 자리에, 그 정도의 레벨에만 머물게 되는데..

만약 원자핵이 각성한다면, 자신의 둘레를 돌면서 진동하는 전자를 어느 순간 물끄러미 바라본다면?
설득에 대한 설득이 작동되기 시작한다.

원자핵이 전자를 바라보는 순간, 전자에 버금가는 플로우의 자유도를 획득해 나가게 되면서 전자의 궤도에 의미 있는 개입을 하기 시작한다. 원자핵이 전자 궤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전자는 기능적으로 원자핵 주위를 설정하던 궤도 자체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원자핵과 전자 사이에 건조하게 그려져 있던 관계도. 밋밋한 서사.  바로 그 지점부터 새로운 서사는 시작된다.

설득은 일상적 활동이다.
설득은 건조한 기제이다.

설득에 대한 설득.
꽉 짜인 일상이란 거대하고 건조한 궤도에서 시작되는 매력적인 서사의 몸짓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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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쳐, 재회, 태깅 :: 2014/06/11 00:01

포켓이란 앱을 즐겨 사용한다.  PC나 모바일로 웹을 서핑하다가 관심 가는 정보가 있으면 캡쳐한다.  그리고 나중에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타이밍에 그것을 열어서 다시 훑어본다.  훑어보면서 그 정보에 어울리는 단어로 태깅을 하고 어떤 경우엔 페이지 내용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기도 한다. 캡쳐는 순간이고 리뷰는 차분이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던 정보를 다시 만날 때, 특히 그 정보를 잊고 있다가 다시 만날 때, 그 만남은 새로운 맥락 속에서 재조명된다.  태깅을 하면서 그 재조명의 순간을 음미한다.  캡쳐하는 순간 태깅할 수도 있고 나중에 재회할 때 태깅할 수도 있다. 태깅을 한다는 건 접한 정보에 대한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단순히 해당 웹페이지에 부합하는 단어를 부여하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정보를 접했을 때의 순간적 느낌이 태그가 되기도 하고, 정보를 정독하고 난 후 해당 정보를 떠올리기 좋은 단어가 부여되기도 한다. 또한, 정보와는 동떨어진 결을 타고 흐르는 나의 생각을 감당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그 생각의 단면을 단어로 직서하기도 한다. 정보를 만나는 방식을 다변화시키면 정보와의 접점이 다양한 양상을 띠면서 나와 정보가 만나서 상호작용하는 맥락이 다채로워지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정보에 대한 다채로운 태그를 쏟아낼 수 있고 정보는 나에 대한 접근 방식을 다양하게 가져가면서 나와의 만남을 다양한 스냅샷으로 변주한다.

컨텐츠와 만나는 나는 일종의 컨테이너다. 컨테이너는 다양한 컨테이너와 상호작용하면서 컨텐츠를 운반한다.  정보 운반은 상품 택배와는 다른 메커니즘을 띤다. 상품 택배는 상품이 훼손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최대한 상품을 원형 그대로 보존한 채 특정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야 한다. 반면, 정보는 운반 과정 속에서 얼마든지 내용물이 변형될 수 있다. 아니 변형될 수 밖에 없다. 옮기는 사람 자체가 정보에 변형을 가하는 자일 수 밖에 없어서 그렇다.  정보를 옮기는 자가 웹페이지여도, 서비스여도, 사람이어도 정보는 옮겨지는 과정 속에서 불가피한 변형을 받게 된다. 

암묵적으로 운반되는 정보에 가해지는 변형을 보다 명시적인 맥락 속에서 의식적으로 감지하는 놀이가 흥미롭다. 정보를 처음 만났을 때 받은 느낌. 정보를 캡쳐할 때의 마음. 나중에 정보를 다시 만났을 때 정보에 대한 잔존 기억. 재회를 통해 정보를 새로운 시공간에서 다시 리뷰할 때의 감정. 이런 모든 것들이 정보와 나 사이에서 생성되는 서사이다.  그 서사는 어떤 소설보다도 인간적이고 어떤 영화보다도 드라마틱하다.

포켓이란 앱을 즐겨 사용한다. 나는 오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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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독서 :: 2014/04/30 00:00



장편소설의 초중반을 읽었다. 60~70% 정도를 읽은 셈이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로 진입하지 않고 1개월 이상 그 상태로 머물러 있다. 소설이 재미있어서 분명 후반부가 어떻게 전개될 지 매우 궁금했지만 가장 궁금한 그 지점에서 가차없이(?) 중단했다. 읽기를 중단했지만, 남은 후반부에 대한 다양한 상상이 머리 속에서 새록새록 기어 나온다.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주인공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해 관계의 사슬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지, 주인공의 협력 관계에 있는 자들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주인공과 갈등 관계에 있는 자들은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인물과 인물 간의 상호작용은 어떤 변수를 만들어낼 것인지, 관계의 장은 어떤 색깔을 띠며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복합적인 관계망은 어떤 방식의 결론을 낼 것인지, 소설의 결말에서 나는 어떤 메세지를 생성하게 될 것인지. 소설의 완결을 본다는 건, 어찌 보면 참으로 싱거운 이벤트가 아닌가 싶다. 굳이 소설가가 머리를 쥐어짜며 얻어낸 결과물이 나에게 적합한 엔딩이 될 수 있을지, 작가가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끝 모습을 내가 시간을 투입하며 확인할 필요가 과연 있는 것인지.


장편소설을 하루 만에 내달리듯 다 읽어버리는 것보다 이렇게 하는 게 나름 괜찮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계속 '읽기'로만 일관하다 보면 기계적인 리딩 머신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았고, 소설의 구조와 메세지를 음미하기 보단 종착역에 빨리 도달하고 싶은 마음이 앞선 나머지 여행의 향취를 충분히 만끽하지 못하고 질주하는 KTX와도 같은 모습이 되어 버리곤 했다.  달음질의 끝에서 확인하게 되는 건 상상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다소 허무(?)한 결말들. 물론 작가 입장에선 혼신의 힘을 다한 마무리였겠지만 독자 입장에선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하며 달려왔던 길이라서 어지간해선 엔딩 신에서 흠뻑 만족하기가 여간 쉽지가 않을 게 사실이다.


하지만, 독자가 소설의 레일에서 이탈해서 자신 만의 노선을 따라 걸어가는 건 그닥 쉬운 일은 아니다. 자칫 실망스런 시나리오 전개에 허망하게 지쳐버릴 수도 있는 것이라서. 마치 고등학교 때 정석수학 공부하던 모습이 재현될 수도 있다. 문제를 풀다가 지쳐서 책 뒤에 있는 답안지를 슬쩍 보고 문제 풀이 방법을 의존적으로 익히던 그 시절. 실력이 늘기가 어려웠다. 문제풀이 기계가 되어 생각하면서 문제를 풀기 보다는 정해진 모범답안을 외워대는 시간들의 반복. 소설을 단선적으로 줄달음치듯 다 읽는 것은 상상력을 스스로 제한하는 독서 습관의 고착화의 길이다.


1개월의 중단 기간 동안, 나만의 엔딩이 어느 정도 형성되는 듯 싶다. 물론 작가가 정해 놓은 결말과 비교하면 매우 조악한 스토리라인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초중반을 읽으면서 이미 내 안엔 작가의 레일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나만의 서사가 천천히 움트기 시작했던 것이고 그렇게 생성되어 가는 나만의 스토리라인은 초중반을 다 읽은 시점에선, 유치하지만 그 누구도 아닌 나만의 색채가 입혀진 채 수줍은 듯 자신 만의 플로우를 진행한 것이다. 독자의 위치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전개시켜 온 나만의 소설 흐름을 자각하지 못하고 저자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보편적인 소설 읽기의 양상이지만, 그건 왠지 모르게 아쉽다. 독자 참여형 소설 읽기의 방법론은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무의식적으로 내재하고 있다. 그걸 서서히 인지할 수 있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면 독자는 더 이상 수동적 노선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 만의 레일을 구축할 수 있다. 특히 다양한 소설 읽기가 중첩된 스토리라인이 독자의 마음 속에 축조될 수 있다면 그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작품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셈. 물론 그걸 가시화된 언어 표현으로 옮기는 건 매우 어려울 수 있겠지만.


시간이 더 흐르면, 열린 마음으로 작가가 구성해 놓은 후반부를 읽어볼 것이다. 나의 엔딩과 어떻게 다른지, 나의 결말과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지, 나는 어떤 메세지를 발신했고 어떤 메세지를 수신했는지.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그게 소설의 진정한 결말이 아닐까. ^^



PS. 관련 포스트
小說三分之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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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사전 :: 2014/02/26 00:06

소설을 순서 무시하고 읽는 것.

국어사전을 서사적으로 읽는 것.

새롭게 읽기. 진부한 것을 혁신적으로 바라보기.

국어사전을 읽으면서 서사가 떠오른다면.

소설을 읽으면서 언어의 본질을 소환한다면.

사전과 소설을 엮는다면.

진부한 것 속에 혁신이 잠재하고 있음을 이해한다면.

소설이 사전임을 아는 것.

진부가 혁신과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

소설을 읽으면서 사전이 그리워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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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소설 :: 2014/02/17 00:07

앞으로 5년 결정적 미래
머니투데이 특별취재팀 엮음/비즈니스북스

책을 읽고서 미래 예측이란 개념보다는 과거/현재의 fact 나열이란 느낌을 많이 받았다.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선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피하긴 하다.

매력적인 미래 예측이란 무엇일까?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사이의 긴장을 관통하는 것?

과거와 미래 사이에 산수적인 연산의 다리를 놓는 것은 너무 약한 서사가 아닐까 싶다.

수많은 fact 데이터의 축적을 통해 사칙연산적인 미래의 점선을 긋기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알고 있는 fact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 간의 갈등을 야기시키고 그 갈등을 풀어나가는 역동적인 시나리오를 소설가적 역량으로 써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

예측이란 캔버스 위에 과거와 미래가 중첩적으로 투영되어야 한다.
과거와 미래가 예측이란 소설판 위에서 만나고 대화하고 다투고 화해하는 과정을 서사적으로 풀어가는 것.
그게 예측일 것이다.  배우가 전개하는 연기와도 같은.

그리고 그 연기가 끝나고 나면 분명 현재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머금은 과거를 예상하고 미래를 직시하는 살아 숨쉬는 현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선형적인 미래 그림을 품고 있는 현재는 지루한 소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

예측은 '현재'를 새롭게 쓰는 소설이다.
일명 '현재 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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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와 소모 :: 2013/05/15 00:05

소비할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인간은 소비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뭔가를 소비하지 않으면 시간을 보내기 어려울 정도로 소비는 공기와도 같이 인간의 삶 속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 소비는 소비자를 재편한다. 소비자의 일상은 소비에 의해 흘러간다. 소비자의 생각과 행동은 소비 플랫폼 상의 타임라인 상을 하염없이 흘러간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왜 가는지도 모르는 길을 따라 정처 없이 흘러가는 모습.

소비자는 소비의 주체라는 외피를 두르지만 사실상 소비의 객체로서 작동하면서 소모되어 간다. 소비는 인간이 스스로를 소모하는 행위이다. 소비는 뭔가를 자본 시장에 유통시키면서 자본의 흐름을 살찌우는 행위인데 자본은 인간을 단자화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므로 인간은 소비를 하면 할수록 자신의 고유성을 소모하면서 자본의 문법을 고착화시키는데 기여하게 된다.

소비는 소모를 낳고, 소모는 소비를 강화한다.
소비와 소모는 뫼비우스의 띠를 형성하며 인간을 끝없이 단자화시킨다.

소비에 대해 생각하는 자는 소모에 대해 반추하는 자이다. 소비하면서 소모에 대해 생각할 여유를 가질 수 있어야 소모 과다로 인한 고갈을 사전에 컨트롤할 수 있다.

나만의 스토리가 없다는 것. 자본 만의 스토리가 있다는 것. 서사를 잃어버린 좀비와도 같은 인간들이 자본의 문법에 복종하면서 로봇처럼 살아간다.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어버린 과정 자체가 자본 관점에선 가슴 설레는 서사일 것이다. 인간을 개조하고 인간을 변형시키는 가슴 벅찬 성과.

자본의 서사는 날이 갈수록 화려해지고
인간의 서사는 날이 갈수록 빈약해진다.

빤히 들여다 보이는 패턴과 프레임 안에서 쳇바퀴 도는 인간 로봇.
그런 인간 로봇의 쳇바퀴 플레이를 발판 삼아 거대한 세를 형성하게 된 자본.

나만의 스토리를 복구하려면 단자화된 나의 빈약한 플롯을 다양한 생각들과의 연대를 통해 보강해야 한다. 일상의 디지털화는 나만의 고유성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될 수도 있고 더욱 고립될 수 있는 위기일 수도 있다. 소비를 할수록 소모되는 나. '소비-소모'의 순환고리 속에서 헤매기만 할 것인지, 아니면 소비-소모의 연대에 대응할 수 있는 '나' 연대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인지.

나를 소모할 것들이 공기와도 같이 나의 감각기관에 스며들어오는 상황 속에서 무작정 소비만 하며 살아가다간 나의 서사를 송두리째 분실할 우려가 있다. 소비하면서 나의 서사를 챙겨야 한다. 나는 지금 소비하면서 나의 스토리를 얼마나 잃어버리고 있는가, 나의 내러티브는 어느 지경으로 약화되고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영화/드라마 보면서 스토리라인 약하네라고 말할 시간에 소비자로서의 내 모습이 어느 정도의 서사를 갖고 있는지 냉정하게 검토해봐야 한다. 소비-소모의 연대는 너무도 강력해서 멍하니 있다간 홀랑 '나'의 서사를 날려 먹을 수 있다.

소비할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




PS. 관련 포스트
베를린, 서사, 졸음
소비와 소외
생산과 소비
소싱 당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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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uy toms

    Tracked from buy toms | 2013/06/13 11:47 | 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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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서사, 졸음 :: 2013/02/15 00:05

지난 주말에 영화 베를린을 봤다. 도입부를 경과한지 얼마 되지 않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해서 코를 골며 퍼자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꿈까지 꾸다가 영화 중반부 즈음에 이르러 계속되는 액션 굉음에 그만 잠이 깨버렸고 구체적인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대충 감으로 영화 관람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극장에서 잠을 푹 자면 피로도 풀리고 끊어진 스토리를 상상력으로 풀어가는 재미가 있긴 하다. ^^

예전에도 영화 보다가 러닝타임의 절반 이상을 잔 적이 꽤 되는 편인데 이번에도 역시 익숙한 장면이 연출된 셈이다. 나는 왜 영화를 보면서 잘 조는 것일까?  영화관 의자가 너무 편안해서 그런가?  극장 안이 어둡고 따스해서 그런가?

서사를 느끼지 못할 때 그런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멋진 허구적 서사를 기대하곤 하는데, 영화의 서사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졸음이 쏟아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매력적인 서사는 멋진 장면들을 무작정 늘어 놓는다고 생겨나지 않는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 존재하는 빈틈이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해야 하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들이 제각기 쉽게 간파 당하지 않는 역동적인 서사를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  뻔한 프레임, 빤히 들여다 보이는 패턴 내에서 로봇처럼 움직이는 캐릭터들이 장면과 장면 간 빈틈의 부재 속에서 건조한 동선 주행만을 반복하게 되면 나는 급격한 졸음의 침공을 받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베를린은 나름의 매력을 갖고 있긴 하다. 흥미로운 서사가 보이진 않았으나 씬 자체의 퀄리티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전진 스텝으로 일관하는 씬 흐름에 부합하는 사운드도 잘 들려왔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즐거움은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고 영화 관람을 끝내고 나오는 발걸음은 제법 경쾌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영화는 서사보다는 질주형 전진 스텝과 액션의 동선, 배우들 간의 포스 충돌에 방점을 찍고 있는 듯하다. 솔직히 영화 도입부에 흘러나오는 화면/사운드 전개에서 이미 이 영화가 서사엔 그닥 신경 쓰지 않고 잘 짜놓은 액션 동선 상의 강력한 질주로 일관할 것이라는 느낌을 무의식적으로 전달 받고 졸음이 스르륵 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

영화의 서사는 결국 관객 마음 속 서사와의 밀당에서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관객의 마음은 영화를 보면서 나름의 서사를 예상하고 기대한다. 그 기대치에 부합하는 서사의 매력도를 확보할 수 있어야 관객이 영화의 서사를 따라오게 되는 건데 베를린은 나를 끌어당길 수 있는 서사를 확보하진 못한 것 같다.

사람의 서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영화의 서사만 판단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서사에 대해서도 함 평가를 내려보면 매우 재미있을 것이다. '나'는 서사적 매력을 갖춘 사람인가? 아님 그닥 흥미를 제공하지 못하는 지루함/졸음을 유발하는 서사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정해진 액션의 동선 위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로봇인가?

자신 만의 서사가 없는 인간은 마치 좀비와도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일한 (주입된) 욕망을 갖고 균질하게 정량화/상품화된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좀비스런 몸짓이 가득한 세상에서 나만의 서사를 써내려 간다는 것은 난이도 높지만 보람이 매우 큰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베를린을 보다가 졸면서 꿈 속에서 나만의 서사를 써내려가다 쾅쾅거리는 소음으로 깨어나 액션 씬의 수려함에 잠시 나만의 서사를 잊고 영화의 이미지를 감상한다. 이미지는 순간이고 서사는 지속된다. 잠깐 잠깐 이미지를 맛 보는 건 좋다. 하지만 항상 작동하고 있는 '나'라는 이름의 서사를 시종일관 잊고 있으면 안 된다. 세기의 블록버스터를 능가하는 우주적 스케일을 갖고 있는 '나' 서사의 매력도를 잘 챙기지 않으면 어느 순간 '나' 서사를 나의 맘 속에서 상영하다가 그만 확 졸아버릴 수 있다. 그건 너무도 서글픈 일이다.  잘 짜여진 액션 동선 위를 로봇처럼 질주하는 것은 영화에서나 멋있어 보일 뿐이다.  영화는 서사 대신 오직 액션에만 집중할 수도 있고, 내러티브를 내려 놓고 주구장창 스타일에만 전념할 수도 있지만 인간은 차마 그럴 수 없는 것 아닐까?  아무리 로봇스런 액션 동선이 멋있어(?) 보여도 내 인생의 시나리오를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참치 캔의 상태로 무심하게 방치하는 건 넘 비루하지 않을까? ^^




PS. 관련 포스트
경쟁 노예: 이기고 웃는 노예, 지고 우는 노예
세상은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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