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정하면 측정당하고 지배하면 지배당한다. :: 2008/05/16 00:06질적 사고방식은 모든 사물이 각기 고유한 본성과 환원 불가능한 본질을 갖고 있다고 규정한다. 반면, 양적 사고방식은 인간이 물 자체를 인식할 수는 없고 시공간 등을 통한 경험으로 현상을 구성한다고 규정한다. 만약, 시간을 연속적인 흐름으로 파악하여 flow 자체를 인식할 수 있다면 질적 사고방식이 현세를 지배하는 사고방식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지금 시간을 일정하게 분할된 눈금에 의해 파악하고 있다. 눈금 기반의 시간 측정은 표준화와 그에 의한 엄청난 효율증대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눈금은 결코 시간의 본질이 아니다. 모든 상황에 내재한 문제점을 본질 자체에 입각하여 처리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쉽지도 않고 속도도 나지 않는다. 본질적이진 않지만 대략적이나마 동일한 범주로 통일시켜 처리하면 정교한 상호작용, 본질적인 특성은 무시되더라도 높은 효율성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환원주의의 분에 넘친(?) 성공이 시작되었고 그로 인한 딜레마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잘게 쪼개서 컨트롤 가능한 단위로 구성하면 멋지게 보이고 뭔가 문제를 신속/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너무 중요한 것들을 놓치면서 결국 문제 해결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게 마련이다. 인간은 뭔가를 측정하면 컨트롤할 수 있고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사실은 뭔가를 측정하고 지배한다고 느끼는 순간 도리어 인간이 그 뭔가에 의해 측정 당하고 지배당하게 되는 것 같다. (by buckshot ^^) 블로깅을 하면서 측정을 통해 지배를 당하게 되는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트래픽에 대한 집착이다. 첨엔 내가 쓰는 글이 얼마만큼의 트래픽을 창출하는지 가벼운 관심을 갖고 블로그 히트수를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블로그 히트수에 목을 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심지어 트래픽을 위해 블로그 포스팅의 유형까지 커스터마이징하는 유연함까지 보이게 된다. 처음에 블로깅을 시작하면서 생각해 두었던 태그 목록들이 트래픽 몰이에 적합한 인기 검색어로 가득 대체되는 상황을 맞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맞게 되면.. 내가 블로그 트래픽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블로그 트래픽이 나를 측정하는 것이다. 블로그 트래픽이 내가 얼마나 충실히 히트수를 올리는 지를 측정하고 컨트롤하고 지배하는 것이다. 그런 주객전도 현상을 탈피하기 위해 어느 순간 난 내 블로그에서 히트수 카운터를 지워버렸다... 측정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기 위해... ^^ 공즉시색 색즉시공 트래픽을 측정하고 포스팅 수를 측정하고 추천수를 측정하고 댓글 개수를 측정하고 RSS 구독자수를 측정하고 그리고 나서.. 트래픽을 지우고 포스팅 수를 의식하지 않고 추천수에 대한 관심을 끄고 댓글 개수에 유념하지 않고 RSS 구독자수에 초연해지고 그리고 나서.. 다시 또 다른 측정지표를 도입하고 측정하고 측정하고 또 측정하고.. 그리고 나서.. 다시 그것들을 지우고 잊고 의식하지 않고 버리고 색즉시공 공즉시색 ^^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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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 공즉시색] 반야심경, 천개의 고원, 노마디즘 :: 2007/09/22 01:24色不異空 (색불이공) 空不異色 (공불이색) 色卽是空 (색즉시공) 空卽是色 (공즉시색) 빅뱅이론에 따르면 200억년 전에 우주는 점과 같은 상태에서 대폭발이 일어나 팽창을 하여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는 설을 주장한다. '크기가 0이고 밀도와 온도는 무한대'인 특이점 상태에서 우주가 생성되었고 계속 팽창을 거듭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팽창을 멈추고 수축이 전개되면서 결국 하나의 점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현대물리학의 가설은 반야심경에서 주장하는 :"색(물질)이 공에서 나오고 공은 색에서 나온다.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라는 컨셉에 상당히 부합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색'은 무엇을 나누거나 단편적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이고 무엇을 나누는 것이 인간의 단편적 사고의 한계에서 파생된 행위이니 결국 인간의 시각은 본질을 볼 수는 없는 것이고 '물질의 실재'와 '관찰을 통한 물질의 인식' 간에는 gap이 존재한다는... 양자론은, 전자의 위치는 일정한 궤도를 돌지 않고 언제 어디서 튀어 나올지 모르는 전자로 실재한다는 것.. 질량을 측정하기 위해 관찰하면 위치를 측정할 수 없고, 위치를 측정하려면 질량을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전자라는 물질은 확률적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관찰자의 마음먹기에 따라 관측의 결과가 달라지는 전자의 행태.. 관측이 물질에 영향을 준다.. 마음이 물질에 영향을 준다.. 현대물리학과 반야심경은 너무도 닮아 있는 모습이다. 또한 질 들뢰즈가 '천개의 고원'에서 말하고 있는 '리좀'이란 개념도 나름 유사한 컨셉을 지향하고 있는 것 같다. '리좀'이란, 이런저런 줄기들이 어떤 중심뿌리 없이 분기되고 접속되는 모양을 의미한다. 질 들뢰즈는 펠릭스 카타리와 함께 쓴 '천개의 고원'이란 책을 단 2명의 저자에 귀속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천 개의 고원'이란 책이 들뢰즈, 가타리라는 두 사람의 저작으로 간주되지만 그 안에서 그들이 인용한 내용들은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발언했던 것이고 인용이 아닌 내용도 결국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읽고 듣고 경험한 수많은 저자들의 발언을 대신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천개의 고원'은 그런 수많은 타인들의 발언들이 중첩된 연쇄로 이뤄진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혼자 스스로의 생각으로 말하는 경우에도 이미 다른 많은 사람들의 말을 하는 것이고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배치 안에서 나름의 집합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책'은 대상도 주체도 갖지 않는다는 개념이 나오게 된다. "책을 하나의 주체에 귀속시키는 순간, 질료의 가공과 그것의 관계가 갖는 외부성을 무시하게 된다"는 들뢰즈의 말은 반야심경의 컨셉과 매우 닮아 있다고 보여진다. 결국 물질은 그것과 연결된 수많은 다른 물질들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수많은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는 확률적 존재이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물질과 접속하고 만나는가에 따라 다양한 모습이 되는 것이다. '입'이 성대와 접속하여 소리의 흐름을 절단,채취하는 경우엔 '말하는 기계'가 되고 식도와 접속하여 영양소의 흐름을 절단,채취하는 경우엔 '먹는 기계'가 되듯이 욕망/의지에 따라 접속하는 항이 달라짐에 따라 전혀 다른 기계로 작동한다는 것은 양자론의 미시세계나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거시세계 모두 긴밀하게 연결된 물질 네트워크 세계에서 접속과 관계에 의해 다양한 실체로 확률적 생성/변이를 거듭하면서 색즉시공/공즉시색의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반야심경, 천개의 고원/노마디즘은 책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플랫폼이란 생각이 든다. 접속할 때마다 읽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기계가 되게 해주는 책이기 땜에... 솔직히 반야심경을 계속 읽어도 '공(空)'이 뭔지에 대해선 아직도 명쾌한 정의를 내리기가 힘들다. 하지만 딱히 말로 규정하진 못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만 한계투성이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뭔가가 내 마음 속에서 구체화되고 있다는 느낌은 분명히 어떤 확률적 분포로 존재하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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