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에 해당되는 글 15건

인공지능 :: 2018/10/22 00:02

인공지능(AI)..
대단한 하이테크라기 보단

그저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질문과 그에 대한 진심을 다한 대답..
그게 전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휘황찬란한 테크의 물결은 결국 인간 소외로 이어지기 마련이라서..

핵심은
인간에 대한 진중하고 소박한 성찰

나는 누구인가?
자본주의는 인간을 돈 노예로 만들었고
기계주의는 인간을 기계 노예로 만들 것이다.

의도된 결핍
기획된 진부화는

새롭지 않을 것을 새롭다 하며
계속 쓰레기를 양산할 것이다.

인간의 노예 포지션은 계속 공고해질 것이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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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 Black Ager | 2018/10/22 05:54 | PERMALINK | EDIT/DEL | REPLY

    buckshot님도 가을 타시나봐요. 짧은 글 속에 (저 또한 겪고 있는) 허무주의가 가득한 것 같아요. 저보다 오랜 시간 '살아내신' 분으로서, 이렇게 아무리 발달되봤자 본질은 똑같은 것 같은 노예 시스템 속에서 삶의 의미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 BlogIcon buckshot | 2018/10/26 21:40 | PERMALINK | EDIT/DEL

      어려운 질문이십니다. 흑..

      솔직히
      제 자신이 누구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구요.

      그러니 제가 살아내는 '삶' 또한 과연 무엇인가란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모른다는 것을 그저 모른다고 자백할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인 것 같구요.

      그래도 간혹 아주 미세하게나마 제 자신이 누구인지, 내가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어렴풋한 감이 잡히는 찰나같은 순간이 희미하게나마 존재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참 어려운 것 같아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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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입 :: 2017/01/13 00:03

나의 생각이라 생각하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나의 생각이 아닌 외부로부터 주입된 생각인 경우가 많다. 아니 대부분일 수도 있다.

너무나 많은 정보가 외부로부터 나를 향해 주입된다.
특히 모바일 시대가 되면서 폭증하는 정보를 관리해 주는 피드(FEED)라는 개념이 일상 속으로 침투하면서 더더욱 그런 현상이 심화된다.

내가 찾아서 나만의 생각 체계를 구성하고 정보의 깊이를 다져나가는 과정 속에서도 얼마든지 주입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마련인데..

가만히 앉아 있어도 나를 향해 정보가 맞춤형으로 제공되는 흐름이 지속된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주입 메커니즘이 지배하는 시간 속을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나는 주체가 되어 생각하기가 힘들다.
나는 내 자신이 생각의 주체가 되어 사고한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나의 생각을 지배하는 정보들이 있는 것이고
나는 내 취향에 맞는 정보들로 내 주위를 꾸민다.
내 주위에 있는 내 취향의 정보들은 스스로 나의 생각 체계를 구성하고
나의 사고 흐름을 지배한다.

그렇게 통제당하는 나의 뇌는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정보 시스템에 의해 사고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그걸 나 자신의 것이라 은연 중에 믿게 된다.

결국 내 자신이 스스로 생각을 생산하지 못하고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전문화된, 정제된, 권위있는, 믿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그런 정보들이 온통 나를 강력하게 지배하는 흐름이 탄생한 것이다.

그게 FEED이다.
피드는 내 자신이라는 존재는 엷어지고 나를 통제하는 외부 기제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표상하는
2017년 1월 현재의 정보 플로우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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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과 편의성 :: 2017/01/11 00:01

스케일링도 하고 치아 점검도 할 겸해서 몇 년 만에 치과에 갔다.

치아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나로선
의사가 하는 얘기에 대해서 토를 달 수가 없었고
그냥 의사의 얘기대로 나의 치아를 맡길 수 밖에 없았다.

완벽한 무기력함인 동시에
더할 나위 없는 전문화의 향연이며 거기서 우러나오는 편안함

무기력하다는 것은 편하다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편리함이 있다는 얘기다.

사람은 편리함에 끌리게 되어 있다.
편리하면 편리한 쪽으로 기울게 되어 있고
그렇게 기울어진 필드 속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계속 기울기가 유도하는 낮은, 편안한 지점으로 이동하게 된다.

특히 전문화에서 비롯된 무기력함은
권위에 대한 존중, 아니 복종에 근거하고 있는지라
더욱 더 편의성과 맞물리면서 위력을 더하게 된다.

위력적인 무기력함의 세계

그렇게 치아 점검, 관리, 치료의 시간은 흘러갔고
나는 거기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날 하루 중에서 가장 무기력한 시간을 치과에서 보냈다.
그 기간 동안에 철저히 무기력한 신체가 되어 멍한 상태로 입을 벌리고 시간을 흘려 보냈다.

그렇게 흘러가는 무기력의 시간.
내가 의도한 무기력이 아니라 나에게 일방적으로 주입되는 무기력
내가 의도한 무기력은 나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강력함이겠으나
나에게 주입되는 무기력은 내 외부의 강력함과 비견되는 나의 왜소함을 극명히 드러내는 시공간.

그런데..
치과에서만 무기력이 주입되는 건 아닐 듯 하다.

결국 포트폴리오의 문제다.
나에게 주입되는 무기력의 시간이 많을 수 밖에 없으니
나는 어떻게든 내가 의도하는 무기력의 시간을 늘려갈 수 밖에 없다.
누가 누구의 무기력을 주도하는 가??   ㅋㅋ



PS. 관련 포스트
힘있는 무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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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 2016/05/09 00:09

눈에 보이는 공간을 살아가고
감각에 느껴지는 시간 속을 쫓기듯 흘러가다 보면
인간은 명시적인 공간과 시간만 현존하는 것이라 느끼기 쉽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존재로서 갖춰야 할 존재의 감각은 약화될 수 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공간과, 감각기관에 선명하게 드러난 시간은
인간이 아닌 자본을 위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인간으로부터 최대한 이익을 추출하기 위해
공간과 시간을 최대한 자본 환원이 가능한 상태로 포장하기 마련이다.

그런 자본적 프레임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고 그 속에 젖어들다 보면
정작 인간은 자신의 프레임을 상실한 채 어디론가 어리둥절한 상태로 계속 흘러갈 수 밖에 없게 된다.

존재감의 상실이다.
존재의 감각이 어디로 사라졌을까에 대해서 반추해봐야 한다.

존재는 의도가 있어야 존재 감각을 발휘할 수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바라는 것, 내가 지향하는 것이 과연 나의 것인지.
그건 내가 아닌 자본의 욕망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반드시 분석해 봐야 한다.

지금의 나.
자본에 의해 얼마나 잠식 당했는지 명징하게 이해하기 되면

나의 의도가 뭔지
그게 존재하기는 한 것인지

나는 나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완전한 무지에 가까운 상태는 아닌지

조금씩 알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럼
내가 살아가는 시공간이 얼마나 자본에 의해 왜곡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된다.

의도
이해
시공간
시공간 상의 내 위치

지금 보이는 공간, 지금 느끼는 시간. 그런 건 의미가 없다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
느껴지지 않는 시간의 흐름
그 속에 내가 있다는 것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아니, 답하지 못하더라도 그 질문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블로깅을 한다. 물리적 웹 공간이 아닌
내 마음 속에.. :)

중요한 질문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것만큼
인간으로서 비참한 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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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무용 :: 2016/03/23 00:03

기술의 발전은 결국 인간을 필요 없는 존재로 만드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 아닐지.

기술의, 문명의 발전이 어떻게 보면 인간을 이롭게 하는 흐름인 듯 하지만
사실상.. 인간을 이롭게 하는 척 하면서 자신 만을 위한 패러다임으로 객체인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인간이 굳이 주체적 존재로 작동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

인간이 겉으로 보기엔 존재하는 듯 하지만
사실상 '인간'으로 작동하지 않는
그저 기계로 작동하는
아니 기계의 노예로 작동하는
그런 상황으로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있는 것 아닐지.

인간은 한낱 기계가 설정한 알고리즘 기반으로
기계가 툭툭 던지는 트리거에 움찔 움찔 반응하는
단순 반응 기제로만 작동하는 그런 하찮은 존재가 되어가는 것은 아닐지.

그것이 인간이 지금 가고 있는 길이라면.
아니 인간이 간다기 보다는 기계가 인간에게 가주길 바라고 강요하는 그런 길이라면.

인간으로 태어나서
'나'를 알아가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그런 과업이 아닐런지.

그래서
내가 지금 이 순간 블로깅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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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폰 :: 2016/02/19 00:09

지하철, 버스, 거리..

폰을 보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렇게 폰 속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난 거울을 본다.

폰은 거울이다.

사람들은 폰을 갖고 여러가지 행동을 하지만
결국 하는 행동은 '나'를 보는 것으로 귀결된다.

폰 속에 비친 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그런데..
거울은 그렇게 많이 볼 필요가 없는 도구이다.
그저 필요할 때 잠깐만 보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울을 자주 본다는 건
불안함을 의미한다.

결국 사람들은 폰을 수시로 들여다 보면서
불안을 표현한다.

그리고 표현된 불안은 폰 속에 투영되면서 또 다른 불안을 생성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불안은 폰에 대한 집착을 더욱 가중시킨다.

거울을 자주 보는 악순환 구조는 그렇게 고착화 되어간다.

세상에서 제일 많이 보급된 제품.. 거울 폰..
그건 세상에 불안이 거대한 규모로 생산, 배급, 배포, 복제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불안한 만큼 거울폰을 자주 보게 되는 이 시대.
폰 속에 비친 불안한 나의 모습.
그 모습이 안정을 찾을 때, 폰은 거울이 아닌 한낱 도구로 바람직하게 전락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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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 의심 :: 2015/09/16 00:06

경제학이 필요한 시간
한진수 지음/비즈니스북스


내가 지불하는 가격에 대해 의심을 해보려고 마음을 먹게 되면 재미있는 생각의 흐름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제시된 가격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돈을 지불하다 보면 소비자로 정의된 채 하염없이 기계적 지불의 쳇바퀴 속을 맴도는 것이고.

수많은 상품과 서비스에 부착되어 있는 가격
왜 그 가격이어야 하는가?

의심이 시작되면 프레임이 생성된다.

왜 그 가격이어야 하는가?
그 가격에 투입된 노동력
그런 가격을 형성하게 만드는 수요,공급 간의 긴장과 균형
적절하게 포장되고 설득된 소비자 관점의 효용가치

이런 외생적 가격 변인 말고..

정말 그 상품과 서비스가 나에게 왜 그 가격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나만 할 수 있다.

왜 그 가격인가?
철저히 나의 관점에서 가격 구성 요인을 해체하고 재구성해보면
그 상품과 나를 잇는 관계망이 눈에 보일 것이고
그 연결 고리를 살피다 보면 가격 구성의 구조를 나만의 프레임으로 정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결국 내가 정의한 가격과 시장 가격 간의 갭이 산출될 것이고
난 그 갭을 과연 감당할 것인지, 감당하려고 한다면 어떤 기대 효과를 예상하는지에 대해
나의 생각을 정리해볼 수 있게 된다.

시장은 편의상 소비자 가격을 제안하고 빠른 거래를 촉진하려 하지만
시장이 규정한 소비자의 삶을 살아가는데 그치지 않고
가격 자체를 직시하게 되면
소비자가 아닌 진정한 경제 주체로서의 나를 돌아보게 되고
결국 가격은 시장이 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정하는 것이란 평범한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소비자로서의 삶은 당연한 게 아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게 나름 비인간적이라는 걸 잊지 않고 살아갈 필요가 있다.

소비, 그건 인간이 스스로 원했던 게 아니라
자본이 가장 원하는 것이니까.

소비자는 자본이 규정한 인간의 삶이다.
자본에 의해 조종되는 삶이 진행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소비에 대해, 가격에 대해 의심할 수 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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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의 노예 :: 2015/03/18 00:08

기계의 눈동자.
스마트폰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의 눈동자.

폰으로 인해
사람의 눈동자는 기계화 되어간다.

일명 폰봇이다. 폰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모습.

물질 문명의 발전에 의한 인간 확장이 심화되면
결국 확장은 거품을 낳게 되고
거품은 또 다른 거품을 낳고..

그렇게 증폭된 거품은 결국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간을 기계화된 노예로 전락시킨다.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공공장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그 모습.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모습이다.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그 모습.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명백히 인간은 기계가 되어가고 있고, 인간은 이미 기계의 노예다.

기계화의 물줄기.
이젠 돌리기 어려운 것일까.
이 당연하고도 충격적인 흐름 속에서
인간은, 아니 기계의 노예가 된 인간은 어떤 길을 모색해 나갈 수 있을까.
아니 이젠 모색이란 개념 조차 인간의 뇌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건 아닐까...




PS. 관련 포스트
폰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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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odge | 2015/03/25 12:42 | PERMALINK | EDIT/DEL | REPLY

    집, 지하철, 회사, 화장실까지 내 삶을 점령해버린 핸드폰...
    인식하고 나니 살짝 무섭네요 ㅎㅎ
    책한권 사러 가야겠어요...잘읽었습니다^^

    • BlogIcon buckshot | 2015/03/28 14:19 | PERMALINK | EDIT/DEL

      폰에 익숙해진, 아니 폰에 길들여진 손으로 책을 만질 때면 왠지 아련한 느낌마저 듭니다. 책을 만질 때면 폰에 길들여진다는 게 어떤 건지 손이 느끼는 듯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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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인간 :: 2015/03/11 00:01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돈으로 환산하려는 지향성을 보인다.

지금 이 순간도 나의 시간들은 치열하게 돈으로 환산되고 있다.

인간은 그냥 인간일 텐데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숫자로 환원 당하다 보면
스트레스가 쌓이게 된다.

인간은 숫자가 아니고,
인간은 돈으로 간단하게 설명될 수는 없는 존재인데
너무도 거칠게 환원을 당하다 보면
스트레스의 축적은 엔트로피와도 같은 추진력을 갖고 진행되어 간다.

인간소외란 표현은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었는데
이제 자본에 의한 인간소외 현상은 매우 빠른 속도로 인간의 삶을 잠식해 나가는 모습이다.

자본의 욕망을, 열정을 누가 당해낼 수 있을까?
자본은 이제 거대한 욕망과 열정을 바탕으로 영속의 꿈을 꾸기 시작한 듯 하다.
자본 영속의 꿈을 묵묵히 바닥에서 서포트하고 있는 인간들.
인간은 자본에 의해 소외되면서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이제 그냥 '인간'이란 표현은 좀 어색하다.
자본인간. 이렇게 불러야 하지 않을까?



PS. 관련 포스트
암호화된 세상
소비재와 소비노
속도
주체와 객체
나를 찾아온 기적을 알아보기

경쟁 노예: 이기고 웃는 노예, 지고 우는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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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화된 세상 :: 2014/11/03 00:03

플래시 보이스
마이클 루이스 지음, 이제용 옮김, 곽수종 감수/비즈니스북스


이미 상황은 확 바뀌었는데 계속 예전의 잔상만을 안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주식 시장도 그 대표적 예의 하나가 될 수 있겠다. 이미 거래는 사람 대신 로봇이 하고 있는데 마치 사람과 거래 게임을 하듯 주식 시장에서 플레이하는 개미 군단들. 만약 주식 시장의 전경이 자신의 눈 앞에서 적나라하게 펼쳐진다면 과연 주식 거래를 지금처럼 맘 편하게(?) 할 수 있을까?

온라인에서 사람과 대화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대상이 정말 사람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기계의 코드 프레임에 길들여진 자가 기계를 통해 나에게 건네고 있는 그 말이, 그 문장이 과연 사람의 언어일까?

직시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직시하지 못하게 너무나 많은 달라진 fact들이 수면 아래로 모두 숨어 버렸다. 알아야 하는 것들이 대거 암호화되어 있고 정작 나의 감각기관으로 인입되는 것들은 철저히 필터되고 조작된 것들 뿐이다.

예술 관점에서 은유가 행해지는 건 좋다. 그런데 실제 세상살이의 현장에서 통찰과 가치를 전달하기 위한 은유가 아니라 자본의 노예로 인간을 유린하기 위해 조작된 은유가 자행된다면 그건 참 답답한 일이 아닐까 싶다.

Flash boys와 같은 책들이
앞으로도 무수히 나올 수 있을 만큼,
많은 재료들이 세상에 깔려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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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재와 소비노 :: 2013/12/11 00:01

베끼려면 제대로 베껴라
이노우에 다쓰히코 지음, 김준균 옮김/시드페이퍼


책을 읽지 않고 쓰는 글이다. 책 목차만 봐도 메세지가 느껴지기 때문에. ^^

이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맨 마지막 줄에 너무도 인상적인 문구가 보인다.  경영서를 소비재로 끝내지 않기 위하여. 사실 모든 경영서가 소비재 아니던가?  경영서의 일반적 한계를 넘어서고 싶다는 저자의 의지가 엿보임과 동시에 소비재란 단어가 그리 심상치 않은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머리말: 모방의 패러독스

제1장 모방은 은유다: 메타포와 이노베이션
제2장 모방해야 할 본질을 모델링하라: 인도 노점상의 경우
제3장 모방의 4개 요소와 5단계 스텝: 검은
고양이의 혁명
제4장 모방의 창조성: 2개의 카페
제5장 누구를 어떻게 모방할 것인가: 4개의 교사
제6장 지키고, 부수고, 떠나라: 수파리(守破離)
제7장 모방의 함정: 모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할
수 없는 회사
제8장 모방의 반전: 역발상 모델링
제9장 베끼려면 제대로 베껴라: 모방하는 법 모방하기

후기: 경영서를 '소비재'로 끝내지 않기 위하여

소비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소비의 홍수 속에서 소비에 휩쓸리며 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소비가 없으면 단 하루도 살기 어려운 소비 의존적 존재가 아닐까?

소비재의 정의는 아래와 같다.
- 소비재: 인간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일상생활에서 직접 소비하는 재화.

위 문구를 뒤집어 보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 인간: 자본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특별히 축조한 소비 프레임 내에서 마구 유린하는 재화

소비재에 불과한 경영서가 되지 않기 위한 경영서의 몸부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의 저항 아닐까? 소비재와 거의 동급으로 분류되는 인간 존재의 현재 위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간 본연의 몸짓이 필요한 시점이 지금일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저마다의 스토리를 생성하며 살아간다. 책을 내든 책을 내지 않든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스토리를 담은 책을 출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책 후기엔 아래와 같은 후기가 들어가야 한다. ^^

후기: 인간을 '소비노(소비의 노예)'로 끝내지 않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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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 :: 2013/12/04 00:04

KTX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2시간 걸려 이동하는 건 일종의 '시간을 지배하는 행위'이다. 자본과 기술이 만나 시간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 하지만, 그건 제로섬 게임이다. 시간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대신, 공간 음미의 기회를 잃었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선 시간이 돈과 매우 밀접해진다. 시간이 돈과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시간을 아끼고 시간을 관리해서 자본 축적에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마음은 갈수록 고도화된다. 시간 관리를 위해 우선순위가 중요해지고 시간 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속도가 절체절명의 덕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속도가 미덕이 되어갈수록 저속은 희소가치로서의 포지션을 획득하게 된다. 저속은 왠지 게으름, 둔함의 이미지를 연상케 할 수도 있으나 맹목적 고속 지향의 색이 짙어질수록 저속의 의미는 견고해진다. 속도 지상주의 사회에서의 '저속'은 어둠 속 빛과 같은 의미를 발하게 되어있다.

"나는 어느 영역에서 속도에 얽매이지 않는가?"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자. 속도에 얽매이지 않고 나 자신의 페이스를 나의 리듬에 맞게 펼쳐갈 수 있는 뭔가가 있는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건 '나'라는 존재에 매우 밀착되어 있는 뭔가란 얘기다.  빠름 자체가 집착의 대상이 되어버린 환경 속에서 느림을 당당하게 지향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존재감의 발현이다. 나로 하여금 느림을 향유할 수 있게 하는 무엇.  시간에 굴복하는 스탠스보단 시간에 저항하는 몸짓에서 존재는 확인된다.

돈과 시간(돈에 포획된 시간)의 노예가 되어가는 시대에 돈에 영향 받지 않는, 시간/속도에 영향 받지 않는 뭔가를 간직하고 경작할 수 있다는 것. 돈과 시간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인생 자체의 중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

KTX를 타고 공간 이동을 하면서 문득 든 생각.
나는 블로깅을 하면서 느림을 추구한다. 이 세계에선 돈도 시간도 의미를 잃고 블랙홀에 근접한 무기력한 우주 유영체로 전락한다. 나는 어떤 경우엔 빠르고 어떤 경우엔 느리다. 빠름을 외면하고 느림에 충실한 시공간이 나에게 있다는 것. 달리는 KTX 속에서 난 미소를 짓게 된다. ^^




PS. 관련 포스트
휴식감과 숨
로망과 속도, 그리고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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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와 객체 :: 2013/08/23 00:03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책 제목이 살짝 재미 있어서 포스팅을 해본다.

책 제목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나오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연상케 한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다분히 전복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주인이 노예를 지배하고 노예는 주인에게 예속된 것처럼 보이지만,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상호 인정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노예가 주인에게 의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인도 노예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노예가 존재하므로 주인이 존재하는 것이고, 주인이 존재하므로 노예가 존재하는 것에서 주인과 노예는 서로를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는 관계적 의존성이 성립된다.

리더와 팔로워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리더는 팔로워에게 지시하고 팔로워는 리더의 지시를 수행하는 관계는 일견 상하관계로 인식될 수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리더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팔로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팔로워가 없는 리더는 존재할 수 없는 상황에선, 리더는 필연적으로 팔로워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리더'라는 존재가 온통 그 존재의 의미를 팔로워에게 저당 잡히고 있다면 과연 리더가 팔로워의 상위 레벨에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리더가 팔로워의 하위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상호 의존적 관계에선 상과 하의 구분이 매우 공허하다. 설사 상하 관계가 설정되었다고 해도 그 관계는 다분히 전복적 함의를 띨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상은 언제든 하가 될 수 있고 하는 언제든 상으로 군림할 수 있는 공생 관계에 불과한 것이다. 상호 의존의 프레임 속에 들어가는 순간 상과 하는 언제든 전복될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 아니 전복이란 표현보다는 한데 엉켜서 끊임없이 굴러가면서 변화무쌍한 양태의 관계로 역동하는 뫼비우스의 띠 정도로 이해하는 게 적절해 보인다.

상호전복적 관계에선, 상대방을 또 하나의 나로 인식하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주인은 노예를 나의 주인이자 또 다른 나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고 리더는 팔로워를 나의 리더이자 또 다른 나로 대접해야 한다. 나는 고양이를 나의 주인이자 또 다른 나로 간주해야 하는 것이고. 상호의존적 관계에서 전복의 묘를 잘 이해하고 상대방에게 투영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주체와 객체가 구분되기 힘든 표리의 관계임이 명징해 진다.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이고 고양이 또한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이다.
모름지기 관계란 그런 것이다. ^^




PS. 관련 포스트
인간의 확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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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온 기적을 알아보기 :: 2013/03/08 00:08

작년에 매우 인상 깊게 본 드라마가 있다.   드라마스페셜  '기적 같은 기적'이다.
이 드라마를 보고 마음이 저려옴을 느꼈다.

의사에게 간암 말기 선고를 받은 환자가 있다. 그 환자는 상심하고 산속 마을로 잠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는 자신이 시한부 진단을 내린 환자가 암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의사는 그를 찾으러 마을로 들어간다. 그 마을은 암이 걸린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곳에 기적이라 불리는 사내가 있다. 간암말기 선고를 받고도 3년 동안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의사는 그가 바로 그 환자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그 마을엔 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사기가 기승을 부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신분을 숨기고 마을에 들어 온 방송사 PD도 있다. 결국, 방송사 PD는 그 사내의 행적을 추적하여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친 혐의로 경찰에 그를 넘기려 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마을 사람들은 그 사내가 암 환자가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단지 그 사내와 함께 사는 것이 너무 좋아서, 그 사내가 하루라도 더 자신들의 마을에 남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사내의 비밀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마을 사람들에겐 그 사내가 암에 걸리고도 잘 살아가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그 사내가 자신과 함께 살면서 병들고 지친 자신들을 웃게 해주는 것이 기적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기적이란 무엇일까?
모두가 깜짝 놀랄만하고 믿을 수 없고 신비로운 사건이 벌어지면 그게 기적인 걸까?

이 드라마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기적은 모두가 깜놀할 특종뉴스감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의미를 선물해 주는 순간이라고. 정말 소중한 기적은 만인에게 대놓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미소 짓게 하는 것이라고. 그런 기적은 지금 이 순간 나의 노력과 진정성으로 얼마든지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기적은 내가 정의하는 것이라고. 남들이 인정해 줘야 기적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 속에서 수줍은 듯이 은밀하게 생성되는 것이 기적이라고. 우린 날마다 속물스런 기적을 꿈꾸고 살아가지만 진짜 기적은 항상 우리 맘 속 어딘가에 숨어 있듯이 존재하고 있으며 날마다 우리가 자신을 알아봐주길 기대하고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그래서 나만의 기적이 나를 찾아왔을 때 그것을 알아봐 줄 수 있는 나는 정말 행복한 것이라고. 상품화된 기적과 상품화된 행복이 우릴 끊임없이 현혹하고 유린하는 세상이지만 상품화되지 않은, 상품화될 수 없는 기적과 행복은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짧은 단막 드라마였지만 장편 영화를 본 것보다, 50부작 대하드라마를 본 것보다 묵직한 감동을 선물 받은 느낌이다. 이런 드라마를 만난 건 내게 기적 같은 일이다.

진짜 기적의 시점이 언제인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감각은 상품화 알고리즘에 의해 무뎌져 가고 있다. 학생은 학교에서, 회사원은 회사에서, 사업가는 사업현장에서, 각각 자본의 노예가 되어 자본이 요구하는 상품화된 인간이 되어 기꺼이 로봇처럼 살아간다. 학교에서 성적이 우수하면, 회사에서 성과를 내면, 사업현장에서 수익을 내면, 자본의 노예로서 획득한 노예적 성과를 흐뭇해하며 노예/로봇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결과가 안 좋으면 노예/로봇의 삶에 불만족하면서 살아간다. 자본을 신으로 모시면서 자본의 신도가 아닌 자본에게 유린 당하는 노예로 살아가는 삶. 자본의 프레임 안에서 기적을 바라고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거기엔 인간을 위한 그 어떤 배려도 없다. 그런 기적을, 그런 행복을 얻어봐야 남는 건 허망함 뿐이다. 자신을 기꺼이 상품으로 전락시키면서 얻은 자본의 기적, 자본의 행복. 도대체 그게 뭐란 말인가? ^^

상품화된 기적/행복의 시점이 아닌 정말 나에게 중요한 시점이 언제인지 아는 촉을 지녀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내 안의 비상품화된 기적/행복의 시점들을 탐색하는 놀이를 일상화해야 한다. 이 드라마의 감동을 잊지 않고 잘 기억할 수 있다면 비상품화 놀이를 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이지 이 드라마를 본 것은 내겐 크나 큰 행운이다. ^^




PS. 관련 포스트
정보의 분열, 행복과 욕심의 분리
행복, 알고리즘
행복, 그리고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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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노예: 이기고 웃는 노예, 지고 우는 노예 :: 2013/01/28 00:08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부/권력/지위/명예와 같은 속물적 덕목으로부터 자유롭기는 매우 힘들다. 아니 심지어는 그런 속물적 스펙에 인생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왜 사람들은 자신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 유전자에 깊게 새겨진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두려움은 원래 생명 위협 상황에서 가치를 발휘하는 기제인데 문명이 발전하면서 수시로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이 현저하게 줄어든 지금도 '두려움'은 인간 사회를 강하게 압박하며 인간들을 두려움 숭배 로봇으로 만들고 있는 듯하다. 만약 인간의 마음 속에 두려움이 없다면,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 시선에 합당한 스펙을 갖추기 위해 자신의 인생 전체를 던지듯 로봇처럼 살아가는 행태가 과연 이렇게 만연했을까?

부,권력,지위,명예는 유한 자원이라서 그걸 남보다 많이 획득하려는 경쟁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마치 속물적 덕목을 남보다 더 많이 획득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마냥 인간은 인생 전체를 걸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대장정에서 헤어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광경은 정말 우주적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이런 개그적 대서사시를 누가 기획하고 운영하고 있는 것인지 정말 이 상황을 주재한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보면 볼수록 놀랍고 그 안을 살아가는 내 자신이 놀랍고 이런 체계가 굴러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초대형 블록버스터 판타지 무비가 아닐까 싶다. (일상이 이렇듯 거대한 영화관인데 뭐 하러 극장에 가는가? ^^)

무엇보다도 이런 놀라운 상황을 가능케 하는 동력인 '두려움'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두려움'은 정말 대단한 힘을 갖고 있다. 자신을 망각하고 오직 자신을 상품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상품 가치를 드높이기 위한 무한 경쟁 상황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인간소외적 행위, 몰지각한 행위를 당연시하며 인간을 살아가게 하다니, 도대체 두려움 너는 인간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

경쟁지상주의 사회가 낳은 가관을 보면서 두려움에 최상급 찬사를 보내지만, 이 게임에서의 승자는 두려움 하나라는 게 참 안타깝다. 무한경쟁에 뛰어든 수많은 인간들은 두려움이라는 유일한 승자의 발 밑에 엎드려 두려움을 경배하고 두려움에 유린당하는 비참한 패배자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을 두려움은 계속 즐겨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데. 경배를 드리면 경배 드린 만큼 그에 합당한 대우나 케어를 받아야 하는데, 왜 인간은 두려움에 인생 전체를 건 경배를 드리고 두려움으로부터 잔인한 희롱을 당하는 것일까?

경쟁의 결과는 승리도 아니고 패배도 아니다.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순간, 나는 나 자신을 일개 범용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이고 범용품으로 살아가는 한 승리도 패배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남보다 돈을 많이 벌고 남보다 더 좋은 직장에 다니고 남보다 더 좋은 집에 살고 남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 남보다 더 많은 존경을 받고...  아뿔싸~ 여기엔 '나'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타인만 존재한다. 이게 나 자신을 위한 삶일까? 아니면 남을 위한 삶일까?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이타적인 존재였을까? 그리고 이게 과연 이타적 삶일까? ^^  

경쟁의 결과는 인간소외이고 완벽한 범용품으로의 전락이다. 그게 경쟁의 본질이다. 경쟁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 경쟁에서 중요시 하는 스펙에 목을 매며 살아가는 일상 속엔 공허함만이 가득하다. 설사 거기서 좋은(?) 성과를 얻었다고 해도 곧 또 다른 갈증이 찾아오고 근원적 두려움은 점점 나의 목을 조르며 나를 더욱 강하게 압박해 들어올 뿐이다.

결국 "내가 중요시 하는 덕목 속에 내가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란 질문을 던지는 게 중요하고 그 질문 속에 내가 없고 온통 타인이 가득하다면 나는 뭔가 잘못 살아가고 있다는 인정을 해야 할 것이다. 남이 정의한 성공 패러다임, 남이 정의한 행복 패러다임의 바다 속을 해면동물처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두려움이 이끄는 삶. 두려움을 경배하고 두려움으로부터 유린 당하는 삶. 그리고 그걸 인지 못하는 삶. 참 허무한 거다. ^^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흘러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 올 때, 아래와 같이 자문해 보자.

"나는 살아가면서 경쟁 말고 한 게 뭐가 있는가?" 

이 질문에 오직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게임만을 했다라는 답이 나온다면 그건 정말 비참한 것이다. 왜? 경쟁은 이겨도 지는 게임이니까. 왜 지는 게임을 하는가? 왜 유일한 승자인 두려움에게 퍼주기만 하는가? 왜 승리와 패배만 존재하는 유아적이고 치기 어린 이분법 논리가 지배하는 저급한 프레임에서 평생을 보내는가?  과자 하나 주면 헤헤거리고 과자 안 주면 앙앙 우는 유아. 그게 경쟁 프레임 속에 갇힌 인간의 모습인 건데.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과자 하나 얻어 먹으려고 떼쓰고 헤헤거리고 앙앙 우는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다니. 인간이 그렇게 병신 같은 존재인 건가? 두려움을 숭배하고 두려움에 유린당하는 인간. 그건 노예다.

경쟁에서 이기고 웃는 노예, 경쟁에서 지고 우는 노예. 노예들이 가득한 세상.  나 자신이 노예임을 일단 인지라도 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언젠가는 노예스런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정말 나 자신을 아끼고 나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블로깅을 하면서, 경쟁에서 이기고 웃는 노예들과 경쟁에서 지고 우는 노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경쟁은 애니팡, 드래곤플라이트, 다함께차차차를 하듯 걍 가볍게 즐기고 말면 되는 게임이고 그 게임의 유일한 승자는 두려움인 것인데 경쟁의 결과를 놓고 왜 웃고 우는지 난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렇게 두려움의 지배력을 키워주기 위해 웃고 우는 에너지를 다 허비하면 정작 나를 위한 에너지를 어떻게 수급할 것인지. 인간은 정녕 두려움의 힘을 키워주기 위해 태어났고 한 평생을 오직 두려움만 경배하며 살아가야 하는 건가?

블로깅을 하면서 경쟁의 본질을 볼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다행스럽다.
블로깅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개그적 스펙터클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도 못한 채
난 지금도 여전히 경쟁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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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팔리고 싶지 않은 욕구
욕망은 수동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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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The Black Ager | 2013/01/28 19:33 | PERMALINK | EDIT/DEL | REPLY

    사실 두려움은 자본주의 사회 뿐 아니라 공산 사회, 독재 사회, 유목 사회, 봉건 사회 등 체제와 시대를 초월해서 늘 인간의 생존을 위협해온 '존재'인 거죠. 애초에 신의 관념이 생긴 이유도 두려움 때문일텐데, 신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현대 문화권에서 이제 두려움은 자기 자체를 신격화함으로서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경쟁에서 이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진짜, 경쟁 시스템을 이기는 게 과제인 듯 합니다. ^^

    • BlogIcon buckshot | 2013/01/28 20:45 | PERMALINK | EDIT/DEL

      제가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글자들의 어지러움을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해 주시네요. ^^

      "경쟁에서 이기는 게 문제가 아니라 경쟁 시스템을 이기는 게 과제이다."

      존경스럽습니다. 넘 감사드리고 싶구요~

  • 휘리릭킴 | 2013/03/11 15:46 | PERMALINK | EDIT/DEL | REPLY

    그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열등감과 오기로 쓰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쟁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타인을 넘어서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실제 적은 우리보다 더 커 보일 때가 많으니까요..특히 저 같은 경우는 말이죠..^^;;
    또 한편으로는 그 벅샷님이 말한 그 두려움을 무작정 이기려만 하다보니, 또 정작 타인이 보는 나와 내 자신이 보는 나와의 거리감도 생기고 있는 중입니다.
    하...정답이 없는 것 같아요.ㅎㅎ

    • BlogIcon buckshot | 2013/03/11 19:50 | PERMALINK | EDIT/DEL

      두려움은 인간유전자에 깊게 새겨진 코드이기도 하고 인간소외의 경쟁시스템을 서포트하는 거대한 동력이기도 해서 감히 제압하기는 쉽지 않은 상대입니다.

      하지만, 매번 두려움에 맥없이 제압당하기 보다는 아주 가끔씩이라도 두려움을 상대로 멋진 저항, 또는 가벼운 승리를 거두는 경험을 지속하게 된다면 인간의 삶은 보다 더 풍요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블로깅은 두려움 희롱 놀이를 지속하기 위한 좋은 시공간이겠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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