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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 알고리즘 :: 2008/11/19 00:09
부제: 모든 생성은 분자적이다. 2 - 인간 플랫폼
난 천 개의 고원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천 개의 고원에 나오는 아래 문구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 분자적 생성의 예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사람의 피부,손톱,모발은 끊임없이 생성되면서 옛 것을 밀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표층 뿐만 아니라 신체의 다른 장기/조직에서도 역동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얼핏 고정적인 구조처럼 보이는 뼈/치아에서조차 내부에선 끊임없는 분해와 합성이 반복되고 있다. 무수히 많은 원자들이 생명체 내부로 흘러 들어왔다 생명체 내부를 빠른 속도로 흘러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6개월 만에 만난 친구는 6개월 전에 보았던 그 친구와는 분자적 차원에선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생명은 끊임없는 분자의 생성과 소멸의 반복적 동적 흐름 그 자체이며 그 동적 흐름의 평형 상태가 너무도 잘 알아서 유지되고 있어서 생명체는 그 흐름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관념적인 것으로 느껴질 수 있는 사람의 기억/믿음/욕구도 뇌 신경세포들과의 상호 연산작용을 통해 생물학적으로 생성된 물질로써 에너지와 정보의 형태로 몸 안을 타고 흐르고 몸 밖으로 나가서 어떤 대상과 통하는 메커니즘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선 안에서 통할 수 있고 밖으로 통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신체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흐름과 연결이 인간의 핵심인 것이다. (Birth & Death에서 입자 추출하였음) 물질은 그것과 연결된 수많은 다른 물질들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수많은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는 확률적 존재이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물질과 접속하고 만나는가에 따라 다양한 모습이 된다. '입'이 성대와 접속하여 소리의 흐름을 절단,채취하는 경우엔 '말하는 기계'가 되고 식도와 접속하여 영양소의 흐름을 절단,채취하는 경우엔 '먹는 기계'가 되듯이 욕망/의지/접속항이 달라짐에 따라 전혀 다른 기계로 작동한다는 것은 모든 물질들은 네트워크 상에서 접속과 관계에 의해 다양한 실체로 확률적 생성과 변이를 거듭하는 흐름을 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입자 추출하였음) 세상만물이 분자적으로 생성되는 흐름 속에 존재한다면,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Everything Flows가 결국 대세라면, 내가 관심 갖고 있는 '마음'이란 주제에도 비슷한 프레임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마음은 내 안과 타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무엇 사이에 유영하는 흐름 자체인지도 모른다. 물과 정보가 흘러갈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처럼 마음도 무엇과 무엇 사이에서 끊임없이 흐를 때 의미가 있는 것일 수 있다. 마음은 계속 흐르는 것이고 그 흐름을 인식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괴로움/결핍에서 벗어나고 신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신이 신과 접속되어 있음을 상기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르틴 부버 - 나와 너에서 입자 추출하였음) 마음에 비해 뇌의 경우 과학적 탐구가 상대적으로 많이 진전된 상황이다. 뇌는 컴퓨터처럼 생명 없이 뻣뻣하고 건조한 기관이 아니라 축축/출렁거리는 살아 있는 기관이다. 피와 물은 차치하고라도 60종에 달하는 호르몬들이 뇌 안에서 회전하고 있다. 이 호르몬들은 우리가 행동하고 느끼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뇌는 흐른다. 약간의 화학물질이 뇌에 작용할 경우, 우리의 정서와 행동을 바꿀 정도로 우리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평소에 별로 말이 없던 사람이 와인을 원샷하고 갑자기 달변으로 돌변하는 경우는 알코올이 흐르는 뇌에 영향을 주고 있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흐르는 뇌에서 입자 추출하였음)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 실은 호르몬 화학반응의 결과이고 이 메커니즘만 정확히 인지하면 인위적인 조작을 통한 정교한 재현이 가능하다면.. 행복이란 감정도 결국 화학반응의 결과이고 이 반응에 대한 이해/통제가 가능하다면.. 인간만이 느낄지도 모르는 고도의 의식이 결국 물질에서 창발한 놀라운 생물학적 현상이라면 인간이야말로 최고의 복잡계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고도의 컴퓨팅 기능을 수행하는 인간이 게놈 속 유전자 개수 관점에선 지렁이와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매우 재미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같은 개수의 문자를 포함하는 전화번호부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결국, 정보의 핵심은 단순히 비트의 개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트 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정보의 핵심에서 입자 추출하였음) 사람이 수행하는 육체적/정신적, 미시적/거시적인 활동을 모두 분자적인 생성 흐름이라고 볼 수 있고 그 흐름을 통해 사람은 정보를 생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정보들은 사람 안에서 비트 간의 관계를 형성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물리적/관념적 정보는 사람 안에서 정교한 동적평형 흐름을 유지하면서 빠른 속도로 유입/유출되고 있는 것이라면 사람은 일종의 정보 유통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흐르고 시공간 속을 흘러 다닐 때, 사람은 정보를 생성하고 정보는 시공간을 변형시키고 시공간은 사람 속에 존재하게 된다. 결국 인간 개개인의 마음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연결된 컴퓨터 터미널과도 같다. 이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는 인류의 의식 자체이고, 우리 자신의 의식은 단지 모든 인류의 공통된 의식에 뿌리를 둔 데이터베이스의 개인적인 표현일 뿐이다. 이 데이터베이스는 실로 비범한 데가 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 데이터베이스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이 천재적인 데이터베이스를 열람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그 데이터베이스에 항상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곤 했다. 우리 어른들은 그 사실을 잊어버렸을 뿐이다. (마음은 데이터베이스에 접속된 컴퓨터 터미널과 같다에서 입자 추출하였음) 상호작용을 통해 분자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 대표적인 케이스로 인간과 기계와의 관계를 들 수 있다. 발의 확장인 자동차와 귀/입의 확장인 핸드폰은 이미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을 고도로 자동차화, 핸드폰화 시켜가고 있다. 도구로 사용하면 결국 도구에 의해 사용 당하게 된다. 측정을 하면 측정 당하고 지배를 하면 지배 당한다. 측정과 지배라는 상황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그 상황 속에 매몰될 때 일어나는 역작용은 이제 예사로운 현상이 되어 버렸다. 생명의 본질이 유입/유출, 삶/죽음의 끊임없는 동적평형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생명 플랫폼 상에서 생명체를 지배하는 알고리즘의 작동을 관찰하고 이해하고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확장 2에서 입자 추출하였음) 인간 뇌의 발달과 궤를 같이 하는 현대문명의 발달은 과거를 '오래된 미래'로 규정하고 그리워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될지도 모른다. 인류 진화의 방향은 어쩌면 고도화를 가장한 삑사리일지도 모른다.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생명체는 뇌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뇌를 쓸 일도 없다는 거... 최고의 개체수를 자랑하는 박테리아는 단세포 생물로서, 다세포의 신호체계나 복잡한 행동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도 당당하게 생존하고 있다. 무능력하게 보이는 외관과는 정반대로 박테리아는 북극의 툰드라에서 부글거리는 유황 온천까지 생태학적으로 적합한 모든 장소에서 적응해왔다. 뇌는 단지 자신의 생존을 위한 고도화만 거듭해 온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관점에선 무수히 많은 삑사리를 범하고 있는 게 뇌가 아닐까? (나는 운동한다. 고로 나의 뇌는 존재한다 에서 입자 추출하였음) 지구상에서 가장 고도화된 생명체인 인간.. 플랫폼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가 아직 너무 부족하고 글재주가 부족하여 오늘은 여기까지만 적어야 할 것 같다. 완전 잡문이다.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한 생각을 계속 발전시켜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 PS. 관련 포스트 모든 생성은 분자적이다. 1 진동적 존재로서의 마음 2 - Compilation Post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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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즉시공 공즉시색] 반야심경, 천개의 고원, 노마디즘 :: 2007/09/22 01:24色不異空 (색불이공) 空不異色 (공불이색) 色卽是空 (색즉시공) 空卽是色 (공즉시색) 빅뱅이론에 따르면 200억년 전에 우주는 점과 같은 상태에서 대폭발이 일어나 팽창을 하여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는 설을 주장한다. '크기가 0이고 밀도와 온도는 무한대'인 특이점 상태에서 우주가 생성되었고 계속 팽창을 거듭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팽창을 멈추고 수축이 전개되면서 결국 하나의 점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현대물리학의 가설은 반야심경에서 주장하는 :"색(물질)이 공에서 나오고 공은 색에서 나온다.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라는 컨셉에 상당히 부합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색'은 무엇을 나누거나 단편적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이고 무엇을 나누는 것이 인간의 단편적 사고의 한계에서 파생된 행위이니 결국 인간의 시각은 본질을 볼 수는 없는 것이고 '물질의 실재'와 '관찰을 통한 물질의 인식' 간에는 gap이 존재한다는... 양자론은, 전자의 위치는 일정한 궤도를 돌지 않고 언제 어디서 튀어 나올지 모르는 전자로 실재한다는 것.. 질량을 측정하기 위해 관찰하면 위치를 측정할 수 없고, 위치를 측정하려면 질량을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전자라는 물질은 확률적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관찰자의 마음먹기에 따라 관측의 결과가 달라지는 전자의 행태.. 관측이 물질에 영향을 준다.. 마음이 물질에 영향을 준다.. 현대물리학과 반야심경은 너무도 닮아 있는 모습이다. 또한 질 들뢰즈가 '천개의 고원'에서 말하고 있는 '리좀'이란 개념도 나름 유사한 컨셉을 지향하고 있는 것 같다. '리좀'이란, 이런저런 줄기들이 어떤 중심뿌리 없이 분기되고 접속되는 모양을 의미한다. 질 들뢰즈는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쓴 '천개의 고원'이란 책을 단 2명의 저자에 귀속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천 개의 고원'이란 책이 들뢰즈, 가타리라는 두 사람의 저작으로 간주되지만 그 안에서 그들이 인용한 내용들은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발언했던 것이고 인용이 아닌 내용도 결국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읽고 듣고 경험한 수많은 저자들의 발언을 대신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천개의 고원'은 그런 수많은 타인들의 발언들이 중첩된 연쇄로 이뤄진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은 혼자 스스로의 생각으로 말하는 경우에도 이미 다른 많은 사람들의 말을 하는 것이고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배치 안에서 나름의 집합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책'은 대상도 주체도 갖지 않는다는 개념이 나오게 된다. "책을 하나의 주체에 귀속시키는 순간, 질료의 가공과 그것의 관계가 갖는 외부성을 무시하게 된다"는 들뢰즈의 말은 반야심경의 컨셉과 매우 닮아 있다고 보여진다. 결국 물질은 그것과 연결된 수많은 다른 물질들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수많은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는 확률적 존재이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물질과 접속하고 만나는가에 따라 다양한 모습이 되는 것이다. '입'이 성대와 접속하여 소리의 흐름을 절단,채취하는 경우엔 '말하는 기계'가 되고 식도와 접속하여 영양소의 흐름을 절단,채취하는 경우엔 '먹는 기계'가 되듯이 욕망/의지에 따라 접속하는 항이 달라짐에 따라 전혀 다른 기계로 작동한다는 것은 양자론의 미시세계나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거시세계 모두 긴밀하게 연결된 물질 네트워크 세계에서 접속과 관계에 의해 다양한 실체로 확률적 생성/변이를 거듭하면서 색즉시공/공즉시색의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반야심경, 천개의 고원/노마디즘은 책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플랫폼이란 생각이 든다. 접속할 때마다 읽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기계가 되게 해주는 책이기 땜에... 솔직히 반야심경을 계속 읽어도 '공(空)'이 뭔지에 대해선 아직도 명쾌한 정의를 내리기가 힘들다. 하지만 딱히 말로 규정하진 못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만 한계투성이인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뭔가가 내 마음 속에서 구체화되고 있다는 느낌은 분명히 어떤 확률적 분포로 존재하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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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디즘을 읽다가 떠오른 예전 2개의 포스팅 :: 2007/09/07 00:02노마디즘의 아래 문구를 읽다가 화폐가 지배하는 상품세계에서는 기발하게 만들어진 어떤 새로운 상품이라도 얼마짜리 상품에 불과하다. 화폐라는 단일한 척도에 의해, 단지 양적 차이만 갖는 상품으로 동질화되고 만다. 전에 알지 못했던 아주 이질적인 것이 나타났을 때도 통상 우리가 아는 문명은 이를 다양성을 확장시키는 계기로 삼기보다는 기존에 존재하는 것 안에 갖다 놓음으로써 동질화하고 동일화하는 과정에 끌어들인다. 아메리카 인디언,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이질적인 삶의 방식을 자신들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문화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자신들의 문명 안에 들어올 일종의 과거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문명이란 이름으로 동질화하고 동일화하여 지상에서 제거해야 할 무엇으로 만들었다 예전에 쓴 아래 두 개 포스팅이 생각났다. 앞으론 들뢰즈의 리좀적 사유를 많이 시도해야 할 것 같다. 은연 중에 환원주의적 사고방식에 너무 많이 젖어 버린 것 같다.. 환원주의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중요한 걸 잃어버리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언 미래를 과거로 착각하기 까지 하니 나원참...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선생을 파괴하면서 배우는 학생
라다크 개방/개발 전의 라다크 주민들의 서방세계에 대한 반응은 이랬다. "모든 사람이 우리처럼 행복하지 않단 말입니까?" "여긴 가난 같은 건 없어요." 하지만 1975년부터 마을에 대한 서구화가 시작되면서 반응은 이렇게 바뀐다. "당신들이 우리 라다크 사람들을 도와주었으면 좋겠어요. 우린 너무 가난해요." 더 편리하고 문명화된 생활을 하기 위해 자연을 개발했을 뿐인데 왜 라다크 사람들은 가난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서구 문명에 비춰 열등한 문화로 정의되는 순간부터 일이 꼬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라다크는 미개한 마을이 아니라 병들어가고 있는 서구적 기술 문명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오래된 미래 교과서였던 것이다. 결국 저자인 노르베리-호지는 서구적 개발에 반대하는 라다크 프로젝트를 발족 시켜 라다크가 잃어버린 예전의 지혜를 되찾도록 지원한다. 결국 라다크는 서구 문명의 어설픈 수입을 통해 자신 스스로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된 셈이다. 우린 그동안 누구에게 배움을 얻고 실행해 왔는지. 우리도 라다크처럼 자신 스스로에게서 배움을 얻어야 할 때가 아닌지... 아무리 생각해도 서양은 동양을 파괴하면서 엄청 배우고 있는 혜택 받은 학생인 것 같다. [The Wind is My Mother] 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인디언의 지혜, 자연은 인간을 용서하고 있다.
서구인들의 눈에 비친 인디언은 지상의 어떤 종족보다 동물에 가까웠다. 바람의 냄새를 맡고 새 소리를 듣고 나무를 만지고 냇물의 맛을 보며 불을 지피고 이상한 주문을 외우는 인디언들은 분명 자연과 대화를 나눌 줄 아는 마지막 종족이었는지도 모른다. 현대인들은 그런 인디언들에게서 자연과 대화하는 법을 배웠어야 했다. 현대인들은 자연을 이용하고 파괴할 줄만 알지 자신의 삶을 지켜주는 자연의 가치와 자연의 언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인간을 자연은 계속 용서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리고 계속 우리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선물들을 인간에게 제공하고 있다. 자연은 인간과 연결되어 있고 인간에게 지속적인 메세지를 보내고 있다. 인간은 그런 자연의 마음을 이젠..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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