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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을 수 있다는 것 :: 2012/02/15 00:05

길을 잃는다는 다분히 수동태적 의미를 지닌다.
길을 잘 찾아가고 싶은데 길을 잃는 것. 그게 길 잃기의 지배적인 모습이다.

반면,
길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나는 항상 다니는 길이 있다. 그 길을 갈 때는 거의 눈을 감고도 원하는 목적지로 갈 수 있을 정도로 그 길은 나에게 매우 익숙하고 친근하다.

그런데,
나는 과연 그 길을 다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주 지극히 제한된 용도로만 그 길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길이 익숙한 것일 뿐,
사실상 나는 그 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지극히 제한된 목적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대상을 이해하는 것.  그게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효율지향적 삶의 자세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단지 효율의 문제일 뿐이고..
대상을 통찰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렌즈를 끼고 살아간다는 관점에선 얘기가 달라진다.

나에게 익숙한 그 길을 좀더 넓은 견지에서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 길은 전혀 새로운 의미로 내게 다가올 수 있다. 그 길이 나에게 전해주는 정보의 양과 질이 증폭되어갈 때 나는 그 길에서 길을 잃게 된다.  나는 그 길을 새로운 렌즈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길을 바라보는 렌즈가 단 1개였다가 그 렌즈의 개수가 수십 개, 수백 개, 수천 개로 늘어나고 그 렌즈들이 다양한 각도로 중첩되어 갈 때 나는 그 길에서 온전히 길을 잃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길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된다.

뻔히 알고 있고 자주 다니는 거리에서 길을 잃을 수 있는 것. 그건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길을 잃는 능력. 그건 고도의 인지 능력이다. "얼마나 길을 잘 잃을 수 있는가?"는 네비게이션 고도화 시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질문이자 인간의 퀄리티를 좌우할 수 있는 질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고도의 네비게이션이나 디바이스가 아니라 스스로 길을 잃을 수 있는 네비게이션/디바이스 무력화 능력인 것이다. ^^


PS. 관련 포스트
길을 안다는 것 (知道)
실도, 알고리즘
혁신의 기회와 캐쉬 메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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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구월산 | 2012/02/15 23:44 | PERMALINK | EDIT/DEL | REPLY

    길 이야기가 나와서 못참고..ㅎ
    이쪽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하고 안가 본 골목길이나 지름길을 갈 때 한번씩 길을 잃고 헤매는데 저는 그 헤매는 과정이 참 즐겁더라고요. 못 보던 건물들이나 가게도 보고, 이런 데도 있구나 하고 와하게 되고. 근데 익숙한 길에서 길을 잃는다는 건 좀 다른 일인것 같네요. 그건 정말 멋진 일이죠.

    • BlogIcon buckshot | 2012/02/16 23:51 | PERMALINK | EDIT/DEL

      익숙한 길에서 길을 잃을 수 있으면, 낯선 길에서 날라다닐 수 있을 것 같아요. 구월산님 댓글 덕분에 길 잃기 내공을 더욱 강하게 키워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BlogIcon LEO레오 | 2012/02/18 12:25 | PERMALINK | EDIT/DEL | REPLY

    철학적인 글 잘 보았습니다. 비슷한 생각이라도 이렇게 단단한 언어로
    표현하니 새롭게 다가옵니다. 아마도 오랜 경험에서 우러난 말의 힘일
    까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목 밑에서 막혀서 우물쭈물 하는 제 자신
    에 한심스러워 질 때도 있습니다.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에 위안을 삼는
    게 고작이지요.

    익숙한 길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 몇 마디의 말에 작지만 큰 충격을 받았
    습니다. 우리는 평상시 하던 일, 먹던 음식, 가던 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몰라도 될지도 모르지만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눈
    에 보이는 효율만이 전부는 아니겠지요.

    평범한 일이라도 입체적인 시각으로 꿰뚫어 보는 통찰력. 오래 지켜보고
    많이 행해봐야 조금씩 사고가 트이겠지요..? 저 역시 가지고 싶은 능력입
    니다. 지금은 가고 없는 古 스티브 잡스도 익숙함 속에서 참 많이 길을 잃
    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던 철학자 소크라테
    스도 마찬가지 일테고요.

    알 수록 모르고, 모를수록 알게 된다... 저는 아직 몰라가는 단계인 것 같
    습니다. 알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우물쭈물 한다고 할까요...
    존경하는 아버지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는데요. "뛰지 마라. 대신 부
    지런히 걸어라" 혈기 왕성하던 시절, 무슨 말인지 잘 몰랐지만 요즈음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buckshot님 말씀대로 익숙할 수록 길을 잃어봐야 겠습니다. 이 조차도
    쉽지 않을 것 같네요. 더욱 더욱 많이 헤매이고 싶습니다. 그럴수록 길
    에 조금씩이나마 다가갈 수 있겠지요...? 이러한 철학적인 담론을 할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게 참 좋습니다. 모든 학문의 끝 혹은 모든 학문의
    바탕에 "철학"이 있다는데요. 그 철학을 찾아 가고자 합니다.

    • BlogIcon buckshot | 2012/02/18 16:37 | PERMALINK | EDIT/DEL

      보통 생존본능과 결부되어 있기 마련인 상상 메커니즘을 의도적인 길잃기 놀이에서 작동시킬 수 있으면 참 재미 있을 것 같습니다. 상상한만큼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니까요. 나는 길잃기 본능을 타고난 생물이다란 주문을 매일 제 자신에게 걸어줘야 할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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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기와 망각, 그리고 기억 :: 2012/02/03 00:03

학창시절엔 암기력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원리를 몰라도 암기만 잘하면 어느 정도 성적을 올릴 수 있으니 수많은 학생들이 암기에 집착하는 것이 당연할 수 밖에 없었다. 학창시절에 멋모르고 했던 암기 행위의 영향력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것 같다. 암기는 정보를 대하는 하나의 태도라서 그렇다. 정보의 의미를 깊게 파헤치지 않고 기계적으로 명기했다가 재생하는 암기 행위.

암기는 매우 치명적인 창의력 파괴활동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스런 정보의 유출입과 정보 간 연결이 창의력 작동의 토대인데 억지로 정보를 어딘가에 붙들어 맨다는 것은 정보 자체의 유연성과 정보의 유동성을 모두 구속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암기를 위한 노력이 가열차게 전개될수록 창의력을 유지하기 위한 반작용도 치열하게 일어나게 된다. 망각은 정보 유연성/유동성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적 플로우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대부분의 시간이 화폐화된다. 화폐화된 시간은 망각보다는 암기를 선호한다. 돈의 흐름을 끊임없이 이어가기 위한 치밀한 계획과 실행만이 화폐화된 시간의 무의미한 낭비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화폐화 되어가는 만큼 망각에 대한 거부감은 커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망각은 새로운 정보가 유입되었거나 기존 정보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이다. 그걸 억지로 막기 위해 메모를 하거나 얼럿으로 리마인드하는 것은 기계적인 반응 메커니즘에 스스로를 붙들어 매는 행위이다. 화폐화된 시간이 지배하는 곳에서 살기 위해 메모/리마인드를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부정하긴 어렵지만 기계적 반응 메커니즘을 맹목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에 푹 젖어 사는 태도에 대해선 반성을 해볼 필요가 있다.

기억과 암기를 분리해야 한다. 
그리고, 기억과 망각을 연결시켜야 한다.

기억은 정보의 끊임없는 편집을 의미한다. 동일한 과거의 사건이라도 그것을 다시 호출하는 시점이 언제냐에 따라 기억의 내용은 끊임없이 달라진다. 동일한 정보가 박제된 상태로 계속 유지되는 것은 사고 흐름을 방해하는 암초와 같은 작용을 하게 된다. 그래서 기억은 저장이라기 보다는 동적 편집에 가까운 개념이다 . 그래서 기억은 암기와는 다른 DNA를 갖고 있는 것이고 오히려 망각과 밀접한 포지셔닝을 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화폐화된 시간 속에서 불가피한 암기를 하면서도 나의 기억과 창의력이 맹목적인 암기로 인해 교란을 당한다는 사실은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그것을 분명히 인지하면 할수록 암기와 망각 간의 절묘한 균형상태를 유지할 수 있고 그 균형 속에서 나의 기억, 정체성, 창의력은 선명한 존재감을 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스마트 디바이스가 창궐하면서 암기 에이전트 기능이 발전해 나갈수록, 망각 관리 능력은 점점 더 희소성과 소중함을 더해갈 것이다. ^^



PS. 관련 포스트
복사기 vs. 재즈뮤지션
기억, 알고리즘
망각,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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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컨텐츠 BM의 구멍? :: 2012/01/16 00:06

월스트리트 저널 웹사이트에서 Pushing mobile payments 아티클을 보려고 하니까.
To continue reading, subscribe now란 멘트가 나온다.  돈 내고 보란 얘기다.

그런데,
구글에서 Pushing mobile payments로 검색한 후에
구글 검색결과 페이지에서 해당 기사를 클릭하면,
전체 기사 내용을 다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부지런한 사람들은 월 스트리트 저널을 구독하지 않고 웹사이트를 훑어 보다가 맘에 드는 기사가 나오면 구글 검색을 통해 기사를 보게 될 것이다.  음.. 이거 구멍인데.. ^^

이런 구멍을 일부러 열어두는 건지..
아님 어쩔 수 없이 열어두는 건지..

구글 검색을 통해 랜딩했을 때는 일단 기사의 풀 텍스트를 공개하고, 유저가 다른 기사를 보려고 할 때 돈을 내라고 권유하는 방식이다. 검색을 통한 랜딩 트래픽이 워낙 많을 테니 일단 검색 유저들에겐 문호를 개방하여 컨텐츠의 맛을 보여주고 heavy reading을 하고자 하는 유저에게 불편함을 주어 자연스럽게 구독 유도를 하겠다는 건데. ^^

온라인 뉴스 사이트가 온라인 컨텐츠 유료 정책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인 것 같다. 월스트리트 저널과 같이 검색 랜딩 트래픽에게 풀 컨텐츠를 오픈할 것인가 말 것인가도 의사결정 사항이고 검색 랜딩 트래픽에게 풀 컨텐츠를 오픈한다고 했을 때 몇 번까지 오픈할 것인가도 의사결정 사항이다. 포털의 뉴스 섹션을 통한 랜딩 시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스탠스를 정해야 할 것이고. 유료와 무료 사이에 어떻게 포지셔닝할 것인가는 매우 복잡한 다이내믹스에 대한 고려가 필요한 것이다.

온라인 뉴스 사이트가 pricing에 대한 복잡한 생각들을 정책으로 풀어놓고 이를 실행할 때, 온라인 뉴스 소비자들도 나름대로의 전략을 갖고 온라인 뉴스 사이트의 전략/정책에 대응할 것이다. 돈을 받고자 하는 자와 돈을 순순히 내려 하지 않는 자 간의 벌어지는 복잡 미묘한 의식적/무의식적 신경전.

온라인 컨텐츠 시장에서의 사업자와 소비자가 함께 만들어나가는 공진화의 모습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고 앞으로 계속 점입가경의 양상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



PS. 관련 포스트
비엠, 알고리즘
공짜, 알고리즘
돈받,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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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The Black Ager | 2012/01/16 02:43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저도 타임이나 빌보드 같은 데 웹사이트 보면서 그런 생각 많이 했었는데, 정말 신선하고 공감되는 주제인 것 같아요. ^^ 멀티미디어 콘텐츠 부문도 마찬가지잖아요. 웹하드 쓰는 놈 위에 토렌트 쓰는 놈 있고, 토렌트 쓰는 놈 위에 또 아는 사람만 아는 방법들 쓰는 놈 있고... 그러고 보면 문화라는 게 그렇게 칼 같이 값을 매겨 거래될 수 없다는 관점상, 매매(sales)보다는 기부(contribution)에 중심을 두고 이를 부각시키는 쪽이 장기전 차원에서 더 나은 방향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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