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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tention의 탄생 - 知의 편집공학을 읽고 :: 2008/08/01 00:01'편집'의 사전적 정의 → 언론, 문학, 출판, 음악, 영화 등에서 문자, 이미지, 소리 등을 수집, 분류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정리하는 작업 (출처: 위키백과)
知의 편집공학은 작년 초에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다. 갑자기 이 책이 생각나서 이 책에 대한 얘길 좀 적어보려 한다. 이 책의 저자인 마쓰오카 세이고는 일본 최초의 에디토리얼 디렉터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으며 '편집'에 관한 다양한 프로젝트와 연구를 통해 세상을 '편집'이란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을 조아라 하는 사람이다. 마쓰오카 세이고는 편집을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편집'이란 대상의 정보 구조를 해독하고 그것을 새로운 디자인으로 재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편집은 누구나 다 하고 있다. 주부는 헤드라인을 붙이지도 않고 영상을 잘라 내지도 않지만 그와 비슷한 일, 혹은 그 이상의 일을 하고 있다. 주부는 먼저 몇 가지 요리를 겨냥하고 재료를 산다. 이어서 다년간의 경험을 활용해 훌륭한 조리 순서를 창안해 낸다. 이것은 프로그래밍이다. 조리를 할 때는 야채의 떫고 쓴 맛을 우려 내거나 곁들일 것을 잘게 썰거나 가스레인지의 세기를 조절하며 몇 가지 과정을 함께 처리한다. 접시에 보기 좋게 조리한 음식의 양을 조절해서 담는다. 가족의 식사 습관에 따라 음식을 내는 시간까지 맞춘다. 이것은 정말 훌륭한 편집이다. 이 세상 주부들이 하고 있는 일이 편집이라는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저자가 원체 '편집'이란 단어에 몰입을 하고 있다 보니, 저자는 생명의 역사 조차 정보 편집의 역사로 해석한다. 뭐 과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Birth & Death - 생명은 동적 평형의 흐름 그 자체이다. (생물과 무생물 사이를 읽고) 포스트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생명은 끊임없이 분자의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동적 흐름 그 자체로 간주될 수 있는데 생명체를 구성하는 무수히 많은 분자들에 DNA 정보가 담겨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생명의 역사는 곧 동적 편집의 역사로 간주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Read & Lead의 블로깅 정책 포스트에서 아래와 같이 온전한 창작물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밝힌 바 있다. 전 제가 쓴 글이 온전히 제가 창작한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접한 모든 정보가 은연 중에 제 사고 속으로 파고 들어와서 제 시각으로 재정리가 된 것 뿐이지 제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웹 서핑이나 리퍼러 순례를 하다 보면 제가 포스팅한 글이 여기저기 복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합니다. 제 글을 퍼가신 분들 중엔 출처를 밝힌 분들도 계시고 출처를 밝히지 않은 분들도 계십니다. 출처를 밝히신 경우엔 제가 포스팅한 글이 제 블로그와 함께 알려진 거고 출처를 밝히시지 않은 경우엔 제가 포스팅한 글만 알려진 건데 전 개인적으로 어떤 케이스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제가 쓴 포스팅이 제 색깔을 담고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출처를 밝히신 분껜 감사하다는 표현을 하고 싶고 출처를 밝히시지 않은 분껜 제 글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다는 표현을 하고 싶습니다. http://www.read-lead.com/blog/497#comment8792 그런데 오늘 갑자기 '知의 편집공학'을 떠올리며 이 책을 펼쳐 들어 훑어 보는 순간, 위에 적은 글이 결국 마쓰오카 세이고의 커멘트를 옮겨 적은 것에 불과하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쓰오카 세이고의 '편집'에 대한 집요하고 열정적인 자세가 '知의 편집공학'을 통해 내 마음 속에 들어왔고 1년이 지난 후 마치 나의 생각인 것처럼 Read & Lead 블로그의 정책으로 발현된 것이구나란 생각이 든다. 마쓰오카 세이고는 '知의 편집공학'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난 분명 마쓰오카 세이고의 아래 커멘트에 큰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 나는 창조적이란 말은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리지낼리티란 말을 거의 신뢰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는 오리지낼리티가 있다란 말을 흔하게 듣는데 그가 일본어도 오리지네이트했다는 것일까? 아니면 소설이나 회화, 옥타브라는 양식을 만들어 냈다는 것일까? 어딘가에 약간 새로운 것을 집어넣은 것 뿐이다. 그것은 오리지낼리티가 아니다. 오히려 편집적 성과인 것이다. 나는 아이덴티티라는 견해에도 찬성하지 않는다. 아이덴티티는 자기 동일성이나 자기 일관성으로 번역하는데, 어떤 의식에도 변절이나 변용을 거치지 않은 아이덴티티 따윈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소립자조차 자기 동일성을 지닐 수 없다. 아이덴티티는 기껏해야 국적 등에나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의 개념이다. 그 국적으로서의 아이덴티티도 대체 21세기의 어느 시점까지 주장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서론이 넘 길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 정보 대폭발의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소비자의 주목(관심)이 가장 희소한 자원으로 자리잡으면서 주목 경제 또는 관심 경제 (Attention Economy)란 용어가 탄생하고 점점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하고 있다. 결국 소비자의 시선을 누가 더 많이 점유할 수 있는가에 관한 얘기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진부하다. 모든 것은 편집된다. 모든 것은 정보이다. 정보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정보와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기 마련이다. 정보가 정보를 부르고 정보는 정보를 유도한다. 정보는 고립되어 있지 않고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정보와 정보 간의 관계가 오리지낼리티이고 정보와 정보 간의 관계가 아이덴티티이다. 어떻게 정보와 정보를 혁신적으로 관계 지을 수 있는지가 핵심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데페이즈망처럼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이게 하는 것이 창의력/혁신의 진수인 것이다. 낯설게 보이면 눈에 띈다. 낯설게 보일 수 있다면 Attention Economy에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게 된다. 홀로 존재하지 않고 강력한 연결 본능을 갖고 있는 정보와 정보를 어떻게 하면 창의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가? 혼신의 힘을 다해 깊게 파면서 연구하면 가능할까? 아니면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 하면 가능할까? 정보라는 것이 원래 입체적으로 교차하는 네트워크 속에서 복잡다양한 연결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하이퍼링크 구조라는 점을 감안하면 창의적/혁신적 관계를 탄생시키는 편집은 linear하고 논리적인 탐구 방식으로 접근하기 보단 non-linear하고 파격적인 놀이 방식으로 접근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창의적/혁신적 편집은 재미있게 즐기는 '놀이' 속에서 탄생한다. 생각의 탄생에 나오는 13가지 창의력 도구 중에 11번째 도구가 바로 '놀이'이다. 놀이(Playing)는 관습적 절차, 목표, 게임의 법칙을 벗어나 그저 즐겁게 작업하기를 의미한다.
대상의 정보를 놀이하는 마음으로 해독하고 대상을 재미있게 갖고 놀다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다른 방식으로 보일 수 있게 하는 과정 속에서 대상은 낯설게 보일 수 있게 된다. 근데.. 놀이는 재미 없으면 할 수가 없다. 재미를 느껴야 놀이를 할 수 있는거다.. 어떻게 하면 재미를 느낄 수 있는가? 재미.. 뭔가 새롭다는 느낌이 뇌리를 스쳐야 하지 않을까? 새로움은 무엇인가? 낯설음 아니겠는가? 낯설다는 느낌을 받으려면? 정말 사소해야 한다.. 사소함에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아래 예로 든 사소한 기쁨 리스트를 될 수 있는 한 많이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일기 쓰기, 잡초 뽑기, 악기 연주하기, 요가하기, 구름 바라보기, 계단 오르기, 녹차 마시기, 친구에게 연락하기, 좋아하는 음악 듣기, 거실을 돌아다니며 춤추기, 비오는 소리 듣기, 소리 지르기, 감사 표현하기, 석양 바라보기, 낚시하기, 정원 가꾸기, 어린아이 웃는 소리 듣기, 모래사장 뛰어다니기, 깨끗이 청소하기, 개 쓰다듬기, 아침 일찍 일어나 침묵에 귀 기울이기, 활기차게 걷기, 재미있는 영화 보기, 자신의 장점 적어보기, 친구의 장점 적어보기, 일출 보기, 신문과 빈 깡통 재활용하기, 자신에게 미소 짓기, 외식하기, 아이 안아주기, 촛불을 켜고 식사하기, 평화를 위해 뭔가 하기, 난로가에 앉기, 채소 요리하기, 나무 쪼개기, 심호흡하기, 상상의 나래 펴기, 서로 안마하기, 좋은 노래 부르기, 뜨거운 물에 몸 담그기, 묵상하기, 은밀하게 친절 베풀기, 희망과 사랑이 넘치는 글읽기, 낮잠자기, 맨발로 풀 위 걷기, 스트레칭하기, 외로운 이들에게 전화하기, 그릇 만들기, 자신과 타인을 용서하기, 주말을 아름다운 곳에서 보내기, 노 젓기, 보트 타고 나가기, 새로운 아이디어 만들기, 연날리기, 어린아이 달래기, 사랑하기, 나무 오르기, 동물원 가기, 동네 활기차게 산책하기, 친구 안아주기, 자전거 여행하기, 롤러스케이트 타기, 황당한 생각하기, 창고 치우기, 캠핑하기, 꽃 냄새 맡기, 나무 심기, 바보짓 하기, 목표를 이룬 자신 칭찬하기, 아픈 친구 병문안 가기...
사소한 기쁨이 많으면 놀이를 재미있게 할 수 있고
놀이를 재미있게 할 수 있으면 知의 편집을 할 수 있고 知의 편집을 할 수 있게 되면 Attention이 탄생하게 된다. ^^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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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탄생] 프로페셔널의 열정 > 생각의 기술 :: 2007/11/16 07:57
난 이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엔 이 책은 목차에도 나와 있듯이 Rethinking thinking ('생각'을 다시 생각하기, 생각의 기술) 에 관한 책이고 이 책을 'Rethinking thinking' 이란 말로 압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엔 생각이 달라졌다. 이 책에 나오는 생각의 고수들은 나에게 생각의 도구들을 가르쳐 주고 있다기 보단 자신의 분야에서 어디까지 열정을 펼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읽으면 읽을 수록 머리가 차오르기 보단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더 강해졌고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고수들의 열정에 숙연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보면 13가지 생각의 도구들을 잘 활용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표면적으로 보이는 숙련된 도구 활용 능력의 기저에는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자신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은 프로페셔널로서의 열정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나도 관찰을 한다. 가끔 형상화/추상화도 하고 패턴도 찾아보고 유추도 해보고 한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고수들과 비교할 때 프로페셔널로서의 열정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결국 일에 대한 몰입,열정의 차이가 도구 활용 능력의 차이를 낳게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책은 '생각의 기술'에 대한 책이라기 보단 '프로페셔널의 열정'에 대한 책인 것 같다. 내가 구사하고 있는 생각의 기술을 점검하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현재 나의 열정이 이 책에 나오는 고수들의 열정과 얼마만큼의 gap을 갖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이 내겐 훨씬 더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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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소통의 철학 (망각+연결=소통 → 도행지이성) :: 2007/10/09 05:59
이 책을 접하기 전에 내가 장자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도덕경의 노자와 비슷한 컨셉을 가진 속세초월의 신선사상을 구사하는 중국 철학자라는 정도였다.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는 말이 있듯이 난 장자가 노자 대비 큰 변별력을 갖는 사상을 갖고 있으리란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었다. 2년 전 우연한 기회에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란 책을 통해 고미숙이란 고전평론가를 알게 되었고 인상 깊게 읽었던 고미숙 평론가의 또 다른 저서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 그린비 출판사에서 발간하고 있는 리라이팅 클래식(Re-writing Classics) 시리즈의 일부인 것을 알게 되었다. 리라이팅 클래식 리스트를 둘러보니 나의 관심사와 연결될 수 있는 책들이 좀 있어서 기회가 되면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읽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근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을 무심코 읽다가 모든 생성은 분자적이다란 포스트를 살짝 올렸는데 그린비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의외의 트랙백을 걸어 주셨고 트랙백을 타고 그린비 출판사 블로그를 둘러보다 우연히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란 책을 알게 되었고 이 책이 그린비의 리라이팅 클래식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확인한 후 책을 구입하여 읽게 되었다. 인문/철학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던 내가 인문/철학에 서서히 관심을 갖게 된 과정 속에서 장자는 나에게 조금씩 조금씩 다가왔던 것 같고 난 나름 오랜 준비 기간 끝에 장자를 만나게 된 것 같다. ^^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이 책은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장자에 대한 파격에 가까운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저자(강신주)는 노자와 장자는 전혀 다른 사상적 기반을 갖고 있다고 역설한다. 노자의 도(道)는 민중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드는 일관된 통치의 방법/원리를 의미한다. 또한 노자는 통치자와 민중이라는 위계질서를 자명한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 노자의 텍스트가 81장으로 구성된 철학시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시라는 운문의 형태를 띠고 난해한 형이상학을 피력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독자층을 통치자나 통치계층에 국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반면, 장자는 흥미로운 이야기 형식, 한 번 들으면 잊기 힘든 강력한 소설/에피소드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더구나 이야기의 주인공들도 백정,목수,뱃사공,농부 등 일반민중들이 대다수이다. 이는 장자가 고유한 삶의 지평에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하였지, 결코 빈부귀천이라는 사회적 위계관계로써 인간을 이해하지 않았으며 노자가 자명한 것으로 수용하고 있는 정치적 위계질서를 일종의 꿈에 불과한 것으로 단호하게 비판하고 있다. 노자는 국가 지향적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국가주의 철학자였고 장자는 민중과 아나키즘을 지향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주의 철학자인 노자와는 확연히 다른 노선을 표방했던 장자의 철학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망각과 연결의 실천 철학이다. 망각과 연결은 소통(疏通)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소(疏)는 '막힌 것을 터버린다'를 의미하고 통(通)은 새로운 연결을 뜻한다. 즉, 장자의 '소통'은 기존의 고정된 삶의 형식을 망각과 비움을 통해 극복하여 나와 다른 삶의 형식을 갖는 타자와의 새로운 연결을 모색하려는 의지를 반영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소통을 가장 잘 설명하는 에피소드로 '수영 이야기'가 있다. 공자는 땅에서의 삶을 가장 잘 영위한다고 정평이 난 사람이다. 그런데 땅의 고수인 공자가 어느 날 육지의 가장 끝, 험악한 폭포수(물)의 영역에 이르게 된다. 자신의 삶의 기술이 무력해지는 이곳에서 공자는 또 다른 고수 한 명을 만나게 된다. 그 고수는 물에서의 삶이 가장 편하다고 느끼는, 다시 말해 수영의 달인이었다. 공자는 그에게 묻는다. "물을 건너는 데 그대는 어떤 특이한 방법이라도 지니고 있는가?" 물의 고수는 이렇게 말한다. "특별한 방법이 있겠습니까? 나는 옛 삶(故)에서 시작하였고 지금의 삶(性)에서 자라났으며 운명(命)에서 완성하였습니다. 물이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저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나를 물속에서 밀어내면 저도 같이 그 물길을 따라 나옵니다. 물의 도를 따라서 그것을 사사롬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물을 건너는 방법입니다." 그러자 공자가 다시 묻는다. "옛 삶에서 시작하였고, 지금의 삶에서 자라났으며, 운명에서 완성하였다고 그대는 말했는데 무슨 의미인가?" 물의 고수는 대답한다. "제가 육지에서 태어나서 육지에 편안해진 것이 옛 삶이고, 제가 현재 물에서 자라서 물에 편안해진 것이 지금의 삶이며,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된 것이 바로 운명입니다." 수영의 달인은 원래 땅에서의 삶에 익숙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땅과 전혀 다른 규칙으로 흘러가는 물을 만나게 된다. 이 때 땅에서의 방식(선입견)만 고수하고 물을 대하면 물 속에서 허우적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땅 생활에서 축적된 선입견을 버리고(잊고/비우고) 물에서의 새로운 방식을 몸으로 익혀 나갈 경우(연결) 물을 땅과 같이 익숙하게 느낄 수 있고 유유히 물 속에서 수영을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의도하지 않은 채 세상에 태어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특화된 삶의 방식을 몸에 붙인 채 살아간다. 이는 일종의 선입견으로 굳어지면서 다른 공동체에 속한 타자를 만날 때도 그 방식(선입견)을 강요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인생에서 끊임없이 겪게 되는 타자와의 마주침을 파괴적이지 않고 생산적인 모습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선 자신이 갖고 있는 한계에 기반한 자신만의 선입견을 과감히 버리고(잊고/비우고) 타자의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필사적인 연결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장자가 타자와의 소통이라는 난해한 주제를 사유했던 철학자라는 저자의 해석이 매우 신선하다. '타자'라는 개념을 사람으로 한정 짓지 않고 세상 만물로 확대 적용했다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장자의 윤편(輪扁) 이야기도 압권이다. 환공이 회당 높은 곳에서 경전을 읽고 있었고, 윤편은 회당 낮은 곳에서 수레를 깎고 있었다. 윤편이 환공에게 물었다. "공께서는 지금 무슨 말들을 읽고 계십니까? 환공이 "성인의 말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윤편이 "그 성인은 살아 있습니까?"라고 묻자 환공은 "그는 죽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윤편은 말했다. "그렇다면 공께서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옛 사람들의 찌꺼기가 아닙니까?" 그러자 환공이 말했다. "수레바퀴나 깎는 장인인 주제에 네가 지금 경전을 논하려 하는가!" 그러자 윤편이 말했다. "저는 그것을 제 자신의 일에 근거해서 본 것입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엉성하게 작업하면 헐렁해져 견고하게 되지 않고, 꼭 끼게 깎으면 빠듯해서 서로 들어맞지 않습니다. 엉성하지도 꼭 끼지도 않게 작업하려면 저는 그것을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입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제가 제 아들에게 전달할 수 없고 제 아들도 저에게서 배울 수 없는 기술이 있습니다. 이것이 나이 70이 되도록 제가 직접 바퀴를 깎고 있는 이유입니다. 옛 사람은 자신이 전할 수 없는 것과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공께서는 지금 옛 사람들의 찌꺼기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윤편은 자신을 비우고 자신이 직접 수레바퀴가 되어서 수레바퀴를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하면서 수레바퀴와 일종의 소통을 한 셈이다. 그런데 몸과 마음으로 터득한 수레바퀴와의 소통을 언어라는 형식으로 아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고백을 한다. 마찬가지로 성인들은 자신이 살았던 시공간에서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데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고 타자와 직접 소통하면서 얻은 깊이 있는 깨달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바로 옆에 앉혀 놓고 침을 튀기면서 설명을 해줘도 깨달음의 전달이 여의치 않을텐데 곡해의 여지가 심각한 언어로 달랑 남기고 죽었다면 그 경전은 후세 사람들이 읽고 바로 적용하기엔 사실상 불가능하다란 얘길 윤편은 "경전이란 성인의 찌꺼기에 불과하다"란 말로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장자는 계급상의 높낮이는 아무 의미가 없고 오직 누가 소통을 잘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정말 멋진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장자의 사상을 압축한 구절로 道行之而成(도행지이성)을 들 수 있다. 직역을 하면 "도는 걸어가야 이루어진다."가 되는데 저자는 바로 이 구절에서 노자의 道와 장자의 道가 전혀 다른 컨셉을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노자의 道는 세상만물의 시작부터 존재하는 만물의 근본이치를 의미하는 반면 장자의 道는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항상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결국 소통하는 만큼 길이 열리는 것이고 길이 열린 만큼 道가 이뤄진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타자와의 마주침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를 비우고 타자와 연결한다'가 말이 쉽지 어디 그리 만만한 일인가? 나를 비운다는 것도 큰 도전이고 타자와 연결한다는 것도 큰 도전이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날들을 돌이켜 보아도 나를 비웠던 적은 거의 없고 내가 가진 선입견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판단하기만 했던 것 같다. 그러니 타자와의 연결도 그리 매끄럽지 않았던 것 같고... 최근 블로깅을 하면서 다른 블로거들과 덧글과 트랙백을 주고 받는 경험을 하고 있는데 금번 독서를 통해 장자의 지혜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앞으로의 블로깅에 많은 도움을 줄 것 같다. 내가 가진 지식은 분명 내가 처한 시공간적 한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을테고 내 블로깅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지식을 내가 충분히 배울 수 있게 나를 비우고 적극적으로 다른 블로거들과 지식을 교류한다면 장자가 말한 道行之而成을 조금이나마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블로깅 뿐만 아니라 가정,직장,친목 관계에서도 소통의 기본자세인 망각(비움)을 몸에 붙이는 훈련을 착실히 쌓아 나가야 할 것 같다. 그래야만 연결을 예전보다 많이 할 수 있을테니...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을 읽는 내내 생각의 탄생이란 책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생각의 탄생에서 제안하는 생각의 13가지 도구를 한 단어로 압축하면 바로 소통(疏通)이 아닐까 싶다. 무엇인가를 관찰하고 형상화/추상화하고 패턴을 인식/형성/유추하고 몸으로 생각하고 감정이입하고 차원적 사고,모형 만들기, 놀이를 하고 변형/통합하는 것은 결국 무언가와의 소통을 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를 비우고 대상과 나를 연결하는 것... 생각의 탄생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은 소통을 통해 道行之而成(도행지이성)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장자의 사상이 내가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들뢰즈의 리좀과 매우 닮아 있어서 반가웠다. 어쩌면 들뢰즈의 리좀과 닮아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이 책을 샀는지도 모르겠다. 오랜 세월을 거쳐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며 첨단을 달리고 있는 21세기 현대물리학이 기원전 반야심경과 조우하듯이 고민에 고민을 더하며 사유 여행을 거듭하고 있는 서양철학이 결국 기원전 200~300년에 활동했던 장자와 조우하고 마는건가... ^^ 저자가 멋지게 재해석한 장자의 소통(疏通) 철학은 내게 매우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의외의 인물에게 소통이란 개념을 배운 셈인데 그 배움은 앞으로의 내 삶에 큰 영향을 줄 것 같다. 장자의 철학 공식: 忘却 + 連結 = 疏通 → 道行之而成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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