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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에 초연해진 야구팬 :: 2013/05/20 00:00

나는 프로야구를 즐겨 본다. LG 트윈스의 팬이다. 1982년부터 야구를 즐겨 보았으니 야구팬 경력이 31년인 셈이다. LG 트윈스는 1990년, 1994년에 우승을 했는데 그 이후로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 최근 10년 간은 포스트 시즌 진출 자체를 못하고 있으며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는 DTD 이론을 유력한 과학이론(?)으로 굳혀가는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 올해도 LG트윈스는 7위권의 저조한 성적을 보이며 팬들의 마음을 애타게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는 LG가 이기면 기분 좋고 LG가 지면 기분이 나빴다. LG의 팬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 한화가 개막 13연패를 하며 일찌감치 최하위권의 포지션을 굳건히 하고 있는 상황을 보게 되니 승부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되었다. 특히 연패를 거듭하는 과정 속에서도 한화 팬들이 야구를 응원하는 모습을 보면서 짠한 마음도 들게 되니 LG 트윈스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뭔가 변화가 생기고 있는 느낌이다.

솔직히 올해까지는 LG가 언젠가 우승할 것이고 그 날이 과연 언제 올까, 올해는 LG가 포스트 시즌에 진출할 수 있을까란 궁금증과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한화의 모습과 한화 팬들의 표정을 보면서 LG에 대한 기대가 많이 줄어드는 것 같다. LG에게 기대하는 것이 우승이나 포스트 시즌 진출일 필요가 꼭 있을까?란 질문이 처음으로 맘 속에서 생겨났다.

그냥 야구 경기를 보면서 즐기면 안되나? 꼭 이겨야 맛인가? 지면 어떤가? 지는 과정 속에서 뭔가 멋진 플레이가 나오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 치고 달리고 얻어 맞고 아웃시키고.. 그런 역동적 모습 자체가 좋은 거지 꼭 잘 치기만 하고 잘 막기만 해야 하는 건가?

프로야구를 30년 넘게 지켜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한화의 개막 13연패를 견뎌내는 한화 팬들의 한화에 대한 애정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게 된 것 같다.  뭐랄까. 기대를 재설정하는 방법을 배웠다고나 할까. 그 동안 프로야구에 관한 한 기대치를 너무 무미건조하게 설정해 왔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야구를 훨씬 더 즐겁게 관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대치 자체가 너무 딱딱하다 보니 스스로 재미를 반감시키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고 앞으로는 훨씬 더 다양한 관점으로 야구를 즐기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게 다 한화 팬들 덕분이다. 나는 한화 팬들로부터 야구를 어떻게 즐기는가?에 대한 답에 가까운 모습을 보았다.

기대를 OFF시킬 수 있는 능력.
기대치를 자유자재로 설정하는 능력.
그건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한 최고의 핵심 역량이다.

야구에 관한 한 기대치 관리 능력에 있어서 엄청난 허점을 노출해 왔는데
금번에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천만 다행이다. ^^



PS. 관련 포스트
3루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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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온 기적을 알아보기 :: 2013/03/08 00:08

작년에 매우 인상 깊게 본 드라마가 있다.   드라마스페셜  '기적 같은 기적'이다.
이 드라마를 보고 마음이 저려옴을 느꼈다.

의사에게 간암 말기 선고를 받은 환자가 있다. 그 환자는 상심하고 산속 마을로 잠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는 자신이 시한부 진단을 내린 환자가 암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의사는 그를 찾으러 마을로 들어간다. 그 마을은 암이 걸린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곳에 기적이라 불리는 사내가 있다. 간암말기 선고를 받고도 3년 동안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의사는 그가 바로 그 환자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그 마을엔 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사기가 기승을 부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신분을 숨기고 마을에 들어 온 방송사 PD도 있다. 결국, 방송사 PD는 그 사내의 행적을 추적하여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친 혐의로 경찰에 그를 넘기려 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마을 사람들은 그 사내가 암 환자가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단지 그 사내와 함께 사는 것이 너무 좋아서, 그 사내가 하루라도 더 자신들의 마을에 남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사내의 비밀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마을 사람들에겐 그 사내가 암에 걸리고도 잘 살아가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그 사내가 자신과 함께 살면서 병들고 지친 자신들을 웃게 해주는 것이 기적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기적이란 무엇일까?
모두가 깜짝 놀랄만하고 믿을 수 없고 신비로운 사건이 벌어지면 그게 기적인 걸까?

이 드라마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기적은 모두가 깜놀할 특종뉴스감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의미를 선물해 주는 순간이라고. 정말 소중한 기적은 만인에게 대놓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미소 짓게 하는 것이라고. 그런 기적은 지금 이 순간 나의 노력과 진정성으로 얼마든지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기적은 내가 정의하는 것이라고. 남들이 인정해 줘야 기적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 속에서 수줍은 듯이 은밀하게 생성되는 것이 기적이라고. 우린 날마다 속물스런 기적을 꿈꾸고 살아가지만 진짜 기적은 항상 우리 맘 속 어딘가에 숨어 있듯이 존재하고 있으며 날마다 우리가 자신을 알아봐주길 기대하고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그래서 나만의 기적이 나를 찾아왔을 때 그것을 알아봐 줄 수 있는 나는 정말 행복한 것이라고. 상품화된 기적과 상품화된 행복이 우릴 끊임없이 현혹하고 유린하는 세상이지만 상품화되지 않은, 상품화될 수 없는 기적과 행복은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짧은 단막 드라마였지만 장편 영화를 본 것보다, 50부작 대하드라마를 본 것보다 묵직한 감동을 선물 받은 느낌이다. 이런 드라마를 만난 건 내게 기적 같은 일이다.

진짜 기적의 시점이 언제인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감각은 상품화 알고리즘에 의해 무뎌져 가고 있다. 학생은 학교에서, 회사원은 회사에서, 사업가는 사업현장에서, 각각 자본의 노예가 되어 자본이 요구하는 상품화된 인간이 되어 기꺼이 로봇처럼 살아간다. 학교에서 성적이 우수하면, 회사에서 성과를 내면, 사업현장에서 수익을 내면, 자본의 노예로서 획득한 노예적 성과를 흐뭇해하며 노예/로봇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결과가 안 좋으면 노예/로봇의 삶에 불만족하면서 살아간다. 자본을 신으로 모시면서 자본의 신도가 아닌 자본에게 유린 당하는 노예로 살아가는 삶. 자본의 프레임 안에서 기적을 바라고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거기엔 인간을 위한 그 어떤 배려도 없다. 그런 기적을, 그런 행복을 얻어봐야 남는 건 허망함 뿐이다. 자신을 기꺼이 상품으로 전락시키면서 얻은 자본의 기적, 자본의 행복. 도대체 그게 뭐란 말인가? ^^

상품화된 기적/행복의 시점이 아닌 정말 나에게 중요한 시점이 언제인지 아는 촉을 지녀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내 안의 비상품화된 기적/행복의 시점들을 탐색하는 놀이를 일상화해야 한다. 이 드라마의 감동을 잊지 않고 잘 기억할 수 있다면 비상품화 놀이를 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이지 이 드라마를 본 것은 내겐 크나 큰 행운이다. ^^




PS. 관련 포스트
정보의 분열, 행복과 욕심의 분리
행복, 알고리즘
행복, 그리고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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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노예: 이기고 웃는 노예, 지고 우는 노예 :: 2013/01/28 00:08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부/권력/지위/명예와 같은 속물적 덕목으로부터 자유롭기는 매우 힘들다. 아니 심지어는 그런 속물적 스펙에 인생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왜 사람들은 자신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 유전자에 깊게 새겨진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두려움은 원래 생명 위협 상황에서 가치를 발휘하는 기제인데 문명이 발전하면서 수시로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이 현저하게 줄어든 지금도 '두려움'은 인간 사회를 강하게 압박하며 인간들을 두려움 숭배 로봇으로 만들고 있는 듯하다. 만약 인간의 마음 속에 두려움이 없다면,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 시선에 합당한 스펙을 갖추기 위해 자신의 인생 전체를 던지듯 로봇처럼 살아가는 행태가 과연 이렇게 만연했을까?

부,권력,지위,명예는 유한 자원이라서 그걸 남보다 많이 획득하려는 경쟁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마치 속물적 덕목을 남보다 더 많이 획득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마냥 인간은 인생 전체를 걸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대장정에서 헤어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광경은 정말 우주적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이런 개그적 대서사시를 누가 기획하고 운영하고 있는 것인지 정말 이 상황을 주재한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보면 볼수록 놀랍고 그 안을 살아가는 내 자신이 놀랍고 이런 체계가 굴러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초대형 블록버스터 판타지 무비가 아닐까 싶다. (일상이 이렇듯 거대한 영화관인데 뭐 하러 극장에 가는가? ^^)

무엇보다도 이런 놀라운 상황을 가능케 하는 동력인 '두려움'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두려움'은 정말 대단한 힘을 갖고 있다. 자신을 망각하고 오직 자신을 상품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상품 가치를 드높이기 위한 무한 경쟁 상황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인간소외적 행위, 몰지각한 행위를 당연시하며 인간을 살아가게 하다니, 도대체 두려움 너는 인간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

경쟁지상주의 사회가 낳은 가관을 보면서 두려움에 최상급 찬사를 보내지만, 이 게임에서의 승자는 두려움 하나라는 게 참 안타깝다. 무한경쟁에 뛰어든 수많은 인간들은 두려움이라는 유일한 승자의 발 밑에 엎드려 두려움을 경배하고 두려움에 유린당하는 비참한 패배자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을 두려움은 계속 즐겨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데. 경배를 드리면 경배 드린 만큼 그에 합당한 대우나 케어를 받아야 하는데, 왜 인간은 두려움에 인생 전체를 건 경배를 드리고 두려움으로부터 잔인한 희롱을 당하는 것일까?

경쟁의 결과는 승리도 아니고 패배도 아니다.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순간, 나는 나 자신을 일개 범용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이고 범용품으로 살아가는 한 승리도 패배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남보다 돈을 많이 벌고 남보다 더 좋은 직장에 다니고 남보다 더 좋은 집에 살고 남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 남보다 더 많은 존경을 받고...  아뿔싸~ 여기엔 '나'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타인만 존재한다. 이게 나 자신을 위한 삶일까? 아니면 남을 위한 삶일까?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이타적인 존재였을까? 그리고 이게 과연 이타적 삶일까? ^^  

경쟁의 결과는 인간소외이고 완벽한 범용품으로의 전락이다. 그게 경쟁의 본질이다. 경쟁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 경쟁에서 중요시 하는 스펙에 목을 매며 살아가는 일상 속엔 공허함만이 가득하다. 설사 거기서 좋은(?) 성과를 얻었다고 해도 곧 또 다른 갈증이 찾아오고 근원적 두려움은 점점 나의 목을 조르며 나를 더욱 강하게 압박해 들어올 뿐이다.

결국 "내가 중요시 하는 덕목 속에 내가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란 질문을 던지는 게 중요하고 그 질문 속에 내가 없고 온통 타인이 가득하다면 나는 뭔가 잘못 살아가고 있다는 인정을 해야 할 것이다. 남이 정의한 성공 패러다임, 남이 정의한 행복 패러다임의 바다 속을 해면동물처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두려움이 이끄는 삶. 두려움을 경배하고 두려움으로부터 유린 당하는 삶. 그리고 그걸 인지 못하는 삶. 참 허무한 거다. ^^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흘러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 올 때, 아래와 같이 자문해 보자.

"나는 살아가면서 경쟁 말고 한 게 뭐가 있는가?" 

이 질문에 오직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게임만을 했다라는 답이 나온다면 그건 정말 비참한 것이다. 왜? 경쟁은 이겨도 지는 게임이니까. 왜 지는 게임을 하는가? 왜 유일한 승자인 두려움에게 퍼주기만 하는가? 왜 승리와 패배만 존재하는 유아적이고 치기 어린 이분법 논리가 지배하는 저급한 프레임에서 평생을 보내는가?  과자 하나 주면 헤헤거리고 과자 안 주면 앙앙 우는 유아. 그게 경쟁 프레임 속에 갇힌 인간의 모습인 건데.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과자 하나 얻어 먹으려고 떼쓰고 헤헤거리고 앙앙 우는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다니. 인간이 그렇게 병신 같은 존재인 건가? 두려움을 숭배하고 두려움에 유린당하는 인간. 그건 노예다.

경쟁에서 이기고 웃는 노예, 경쟁에서 지고 우는 노예. 노예들이 가득한 세상.  나 자신이 노예임을 일단 인지라도 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언젠가는 노예스런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정말 나 자신을 아끼고 나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블로깅을 하면서, 경쟁에서 이기고 웃는 노예들과 경쟁에서 지고 우는 노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경쟁은 애니팡, 드래곤플라이트, 다함께차차차를 하듯 걍 가볍게 즐기고 말면 되는 게임이고 그 게임의 유일한 승자는 두려움인 것인데 경쟁의 결과를 놓고 왜 웃고 우는지 난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렇게 두려움의 지배력을 키워주기 위해 웃고 우는 에너지를 다 허비하면 정작 나를 위한 에너지를 어떻게 수급할 것인지. 인간은 정녕 두려움의 힘을 키워주기 위해 태어났고 한 평생을 오직 두려움만 경배하며 살아가야 하는 건가?

블로깅을 하면서 경쟁의 본질을 볼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다행스럽다.
블로깅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개그적 스펙터클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도 못한 채
난 지금도 여전히 경쟁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을 테니까. ^^



PS. 관련 포스트
쪽팔리고 싶지 않은 욕구
욕망은 수동태이다.
사라진 원인, 좀비가 된 결과
타존, 알고리즘
자존, 알고리즘
우열, 알고리즘
경쟁, 알고리즘
소외, 알고리즘
제허, 알고리즘
비교, 알고리즘
범용,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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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The Black Ager | 2013/01/28 19:33 | PERMALINK | EDIT/DEL | REPLY

    사실 두려움은 자본주의 사회 뿐 아니라 공산 사회, 독재 사회, 유목 사회, 봉건 사회 등 체제와 시대를 초월해서 늘 인간의 생존을 위협해온 '존재'인 거죠. 애초에 신의 관념이 생긴 이유도 두려움 때문일텐데, 신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현대 문화권에서 이제 두려움은 자기 자체를 신격화함으로서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경쟁에서 이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진짜, 경쟁 시스템을 이기는 게 과제인 듯 합니다. ^^

    • BlogIcon buckshot | 2013/01/28 20:45 | PERMALINK | EDIT/DEL

      제가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글자들의 어지러움을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해 주시네요. ^^

      "경쟁에서 이기는 게 문제가 아니라 경쟁 시스템을 이기는 게 과제이다."

      존경스럽습니다. 넘 감사드리고 싶구요~

  • 휘리릭킴 | 2013/03/11 15:46 | PERMALINK | EDIT/DEL | REPLY

    그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열등감과 오기로 쓰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쟁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타인을 넘어서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실제 적은 우리보다 더 커 보일 때가 많으니까요..특히 저 같은 경우는 말이죠..^^;;
    또 한편으로는 그 벅샷님이 말한 그 두려움을 무작정 이기려만 하다보니, 또 정작 타인이 보는 나와 내 자신이 보는 나와의 거리감도 생기고 있는 중입니다.
    하...정답이 없는 것 같아요.ㅎㅎ

    • BlogIcon buckshot | 2013/03/11 19:50 | PERMALINK | EDIT/DEL

      두려움은 인간유전자에 깊게 새겨진 코드이기도 하고 인간소외의 경쟁시스템을 서포트하는 거대한 동력이기도 해서 감히 제압하기는 쉽지 않은 상대입니다.

      하지만, 매번 두려움에 맥없이 제압당하기 보다는 아주 가끔씩이라도 두려움을 상대로 멋진 저항, 또는 가벼운 승리를 거두는 경험을 지속하게 된다면 인간의 삶은 보다 더 풍요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블로깅은 두려움 희롱 놀이를 지속하기 위한 좋은 시공간이겠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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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용의 최적점 :: 2013/01/04 00:04

여행을 가겠다고 마음을 먹고 여행을 계획하고 여행을 가서 여행을 즐기다가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는 여행의 과정을 머리 속에서 그려보자. 어느 시점에서 뇌가 가장 기뻐하는가? 

여행을 가기 전에 여행의 즐거움을 상상할 때 가장 기쁘다. 실제 여행을 하게 되는 순간이 도래하면 계획했던 것을 실행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여행이 일종의 행정처리가 되면서 여행의 기쁨이 체감하는 경우가 많다. 뇌는 끊임 없이 상상을 하고 싶어하고 상상을 통해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을 고조시키곤 하는데, 여행은 뇌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기대를 고조시키는 기대 촉진제 역할을 한다. 뇌가 가장 기뻐하는 시점은 기대감이 극대화되는 시점이다. 불안감이 현재와 미래 간의 부정적 차이라면 기대감은 현재와 미래 간의 긍정적 차이에 해당한다.

모든 경험은 시간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고 경험의 흐름의 곳곳에서 효용의 높낮이가 존재하고 특정 지점에선 효용의 최적점이 형성되고 효용의 최적점을 찍은 후엔 점차적으로 효용이 체감하게 된다. 그렇다면 경험의 흐름 속에서 효용이 최적점을 찍은 상황에서 때로는 경험의 과정 자체를 중단하는 것도 충분히 시도해 볼 수 있는 놀이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영화를 볼 생각으로 그 영화에 대한 리뷰들을 읽다가 그 영화의 면모를 다 파악하게 되고 영화를 이미 본 것 같은 느낌과 감동을 얻었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추는 게 좋을 수 있다. 가능하다면.^^

한 편으론,
뇌가 기대를 먹고 살기 때문에 효용의 최적점이 존재하게 되는 원리를 오히려 역이용하는 놀이도 즐겨볼 수 있겠다. 즉, 뇌가 자꾸만 미래에 대한 섣부른(?) 기대를 생성하면서 현재와 미래 간의 에너지 준위차를 자꾸 강요하는데 그런 뇌의 장난질을 약화시킬 수 있다면 성급한 기대감이 나를 지배하는 현상을 줄여나갈 수 있는 것이다. 기대를 한다는 것은 현재에서 벗어나 좋은 경험이 예정되어 있는 미래로 자꾸 달려 나가려는 욕구이다. 불안해 한다는 것은 현재에서 벗어나 좋지 않은 경험이 예정되어 있는 미래로 자꾸 다가가려는 욕구이다. 뇌는 자꾸 현재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끊임없이 뭔가를 예정하고 그것을 향해 시계바늘을 앞당기려는 본능을 갖고 있다. 그 본능이 때로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만 때로는 인간에게 해가 되는 경우도 있어서 뇌의 시계바늘 앞당기기 본능은 적절히 통제될 필요가 있다. 예상에는 2가지 유형이 존재한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건전한 예상과 쓸데 없는 헛걱정,헛기대를 위한 예상. 기대 효용의 최적점이 있어서 경험의 흐름에서 멈춰야 할 지점이 있는 것처럼, 예상에도 최적점이 존재한다. 어디까지 예상하고 기대할 것인가에 집중할 수 있으면 예상과 기대를 멈춰야 할 지점이 존재한다.

기대를 컨트롤하기 싫다면 경험의 흐름에서 멈출 수 있는 지점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은 것이고, 기대를 컨트롤할 수 있다면 기대 자체를 멈출 수 있는 지점을 선택할 수 있으면 좋은 것.  효용의 최적점 관리 놀이를 이제부터 즐겨보도록 하자. ^^



PS. 관련 포스트
기대감을 기획하라
기대 속에 최고의 쾌락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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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와 관점 :: 2012/11/21 00:01

경계는 사물과 공간을 분간하는 기준이 되어준다. 경계가 있어서 세상은 뭉개지지 않고 조각조각 나눠진 뷰로 인지가 가능해진다. 경계가 획정되고 그 안에서 편안하게 지내다 보면 어느덧 경계 안에 갇혀 버리는 부작용도 생기곤 하지만 경계는 무경계 상태의 혼란을 완화시켜주는 안정제 역할을 하곤 한다.

경계를 넘어설 때 관점과 프레임은 변화한다. A 영역과 B 영역이 경계선으로 분할되어 있다면 A 영역에서 편안하게 활용되는 관점이 B 영역에선 수월하게 이용되기 어려울 수 있다. A 영역에 최적화된 관점이 존재하고 B 영역에 최적화된 관점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관점은 경계에 의해 구별되어지고 경계는 관점을 분할된 영역에 특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경계에 의해 배제된 타 영역의 상황과 맥락은 관점을 명확화하는 동시에 구속하게 된다.

경계를 관통하는 관점은 경계를 허물게 된다. A 영역과 B 영역을 포용할 있는 관점이 탄생하면 A 영역과 B 영역은 동일한 프레임으로 포섭되고 단일 언어로 읽혀지게 되면서 서서히 하나의 영역으로 융합되어 간다.

하나의 영역 속에서 관점이 변형되어 하나의 영역이 복수 영역으로 나눠질 때 새로운 경계가 형성된다. 하나의 영역이 분열의 계기를 맞게 되고 나눠진 복수 영역이 각자의 관점을 발전시키고 개별적인 언어 체계를 진화시켜 나가면 영역은 하나였던 때를 까맣게 잊은 듯한 스탠스를 취하며 서로에게서 멀어져 간다.

경계와 경계를 관통하는 관점을 설정하는 힘과 경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관점을 변형시켜 경계를 설정하는 힘은 경계 구도를 재구성하고 관점의 흐름을 재배치한다.

경계는 관점을 자극하고 관점은 경계를 형성한다.
관점을 자극하기 위해 경계를 의식하고 경계를 형성하기 위해 관점을 리뷰한다.

경계 안에서 편하게 상주하는 동시에 경계에서 발생하는 긴장 신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선 경계를 자꾸 터치할 필요가 있다. 스마트 디바이스의 액정만 터치하다 보면 어느덧 스마트 디바이스에 종속된 도구 인간으로 전락하게 되는데 정작 터치해야 할 대상은 액정이 아니라 경계이다. 경계를 터치하고 경계에서 타전되어 오는 신호를 나만의 촉각으로 해석해야 한다. 경계에서 전해져 오는 신호는 경계가 나에게 선물하는 개인화된 메시지이고 나의 관점에 도달된 신호는 나의 관점을 변화시키게 된다.

일정 시간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관점 상에 전시된 경계 구도가 너무도 안정화된 상태라면 나의 관점을 의심해 봐야 한다. 관점이 진부화되고 박제가 되어간다는 신호라서 그렇다. 관점이 왜 굳어지고 있는지 왜 새로운 경계의 생성을 직시하지 못하는지 반성하고 기존에 존재하는 하나의 영역이 복수의 영역으로 분화될 수 있는 분기점이 어딘지를 탐색해야 한다.

경계를 수시로 터치하고 관점을 정기적으로 의심하는 과정 속에서 경계와 과정 간의 순환 고리는 역동적 평형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오늘 나는 경계를 몇 번 터치했는가? 액정을 수백 번 터치할 때 경계를 단 한 번이라도 터치해 보자. 나는 정기적으로 나의 관점을 의심하고 있는가? 쓰잘데기 없는 정보들에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기지 말고 1년에 단 한 번이라도 나의 관점을 의심해 보자. 경계와 관점 간의 순환 고리를 강력하게 형성하는 놀이를 즐길 줄 알아야 자존의 시간들을 나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



PS.
관련 포스트
경계
시지프스의 링 - 영속발전의 플랫폼 (發展 & 發電)
분류, 막..
세포와 세포 사이
막, 도구, 의도, 양자
태그,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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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odge | 2012/11/27 09:00 | PERMALINK | EDIT/DEL | REPLY

    항상 읽으면서 느끼는거지만 비슷한 주제인듯 하면서도 새롭게 표현하는 느낌입니다.
    , 매번 많은 영감 얻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BlogIcon buckshot | 2012/11/27 09:42 | PERMALINK | EDIT/DEL

      하나의 주제를 여러가지 시선으로 포획하면서 음미하는 놀이를 저는 즐기고 있나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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