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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 알고리즘 :: 2009/11/02 00:02'노는 만큼 성공한다'란 책에서 참 재미 있는 문구를 읽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일에 한해서만 책임진다. 내가 선택했다는 느낌이 있을 때, 그 일의 주인이 된다는 이야기다. 통제의 주인은 경영자가 아니라 나 스스로라고 생각할 때, 회사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하게 된다. 통제나 선택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고 여겨질 때 사람들은 자존심이 상한다. 사람들이 자존심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관한 재미있는 실험이 있다. 두 집단의 사람들에게 정말 재미없는 영화를 보여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영화가 무척 재미있다고 거짓말을 하게 시킨다. A집단에겐 거짓말의 대가로 100달러를 주고, B집단에겐 1달러를 준다. 그리고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솔직히 그 영화가 재미있었냐고 물었다. A집단은 재미없었다고 대답한 반면, B집단은 의외로 재미있었다고 대답을 한다. 1달러 받음으로 인한 자존심의 상처가 그런 대답을 낳게 한 것이다. 불과 1달러 받고 거짓말을 하느니, 아예 영화를 재미있다고 자신을 속여가면서까지 자존심을 구기는 상황을 피하고 싶은 것이다. (이 사례는 inuit님의 가장 듣고 싶은 한 마디 yes!의 133페이지에도 나온다. 인지부조화에 대한 멋진 설명과 함께. ^^) 통제/선택의 주인이 자신일 때 자존감/주인의식이 급상승하는 현상.. 문득, 좀비, 알고리즘에서 인용했던 좀비적 인간의 삶에 대한 포스트 2개가 떠오른다. ^^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유전자는 컴퓨터 프로그램 작성자처럼 간접적으로 생존 기계의 행동을 제어한다고 말하고 있다. 유전자가 인간을 인형 끈으로 조정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로 유전자의 단백질 합성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단백질 합성엔 많은 시간이 걸리고 인간의 행동은 신속하게 일어나므로 인간을 통제하기 위해선 다양한 가능성들에 대처하기 위한 규칙과 충고를 최대한 사전에 많이 프로그램으로 미리 만들어 놓는다는 것이다. 유전자는 인간의 몸 속에서 수동적인 존재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그 수동성이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인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능동적으로 모든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착각을 갖게 하는 것이지 사실 인간을 통제하는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프로그램적 입력은 이미 뇌 속에 심어졌고 그것을 통제하는 강력한 사령관이 유전자일 수 있다. (원격, 알고리즘 중에서) 유전자는 동기부여의 대가인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인간을 원격으로 엄청난 조종을 하면서도 사람은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이 거의 모든 것을 선택/결정한다고 착각을 하게 하니 말이다. ^^ 경영은 유전자로부터 동기부여 방법론에 대해 잘 배워야 한다. 결국 기업의 구성원 동기부여는 조직 구성원의 자존심/주인의식 관리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유전자와 같은 고도의 넛지/우직스런 우회적 간접통제 리더십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편으론 '무위(無爲)'라는 개념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유전자의 영향권 아래 있고, 우주/지구/생태계를 주관하는 자연법칙의 지배 하에 있는 인간이 진정 자신의 통제 하에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사실, 냉정하게 판단할 때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인간이 스스로 사고/판단/선택/결정/행동한다는 착각만이 존재하는 것일 뿐.. 사람은 세상에 손님으로 온 것이지 주인으로 온 것이 아니다. 주인은 따로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우주/생태계를 움직이는 법칙이 주인이고 그 안에서 인간을 포함한 수많은 정보들은 단지 주어진 제한적 역할을 묵묵히 기계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일 뿐일지도 모른다. 무위의 의미는 '하지 않음'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고 내가 뭔가를 통제/지배한다는 착각을 없애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요약하면 '주제넘게 오버하지 마라'라고나 할까.. 아무래도 인간은 '주인의식'이란 허상을 버리고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겸허해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주/자연 속에서 인간은 거의 free-rider이니 말이다. 딱히 인간이 우주/자연에게 value-addition하는 것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저 인간은 자연에게 엄청난 쓰레기를 초고속으로 퍼붓고 있을 뿐이다. ^^ 요즘 '무위'란 단어가 참 맘에 들어지기 시작한다~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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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소통의 철학 (망각+연결=소통 → 도행지이성) :: 2007/10/09 05:59
이 책을 접하기 전에 내가 장자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도덕경의 노자와 비슷한 컨셉을 가진 속세초월의 신선사상을 구사하는 중국 철학자라는 정도였다.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는 말이 있듯이 난 장자가 노자 대비 큰 변별력을 갖는 사상을 갖고 있으리란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었다. 2년 전 우연한 기회에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란 책을 통해 고미숙이란 고전평론가를 알게 되었고 인상 깊게 읽었던 고미숙 평론가의 또 다른 저서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 그린비 출판사에서 발간하고 있는 리라이팅 클래식(Re-writing Classics) 시리즈의 일부인 것을 알게 되었다. 리라이팅 클래식 리스트를 둘러보니 나의 관심사와 연결될 수 있는 책들이 좀 있어서 기회가 되면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읽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근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을 무심코 읽다가 모든 생성은 분자적이다란 포스트를 살짝 올렸는데 그린비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의외의 트랙백을 걸어 주셨고 트랙백을 타고 그린비 출판사 블로그를 둘러보다 우연히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이란 책을 알게 되었고 이 책이 그린비의 리라이팅 클래식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확인한 후 책을 구입하여 읽게 되었다. 인문/철학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던 내가 인문/철학에 서서히 관심을 갖게 된 과정 속에서 장자는 나에게 조금씩 조금씩 다가왔던 것 같고 난 나름 오랜 준비 기간 끝에 장자를 만나게 된 것 같다. ^^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이 책은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장자에 대한 파격에 가까운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저자(강신주)는 노자와 장자는 전혀 다른 사상적 기반을 갖고 있다고 역설한다. 노자의 도(道)는 민중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드는 일관된 통치의 방법/원리를 의미한다. 또한 노자는 통치자와 민중이라는 위계질서를 자명한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 노자의 텍스트가 81장으로 구성된 철학시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시라는 운문의 형태를 띠고 난해한 형이상학을 피력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독자층을 통치자나 통치계층에 국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반면, 장자는 흥미로운 이야기 형식, 한 번 들으면 잊기 힘든 강력한 소설/에피소드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더구나 이야기의 주인공들도 백정,목수,뱃사공,농부 등 일반민중들이 대다수이다. 이는 장자가 고유한 삶의 지평에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하였지, 결코 빈부귀천이라는 사회적 위계관계로써 인간을 이해하지 않았으며 노자가 자명한 것으로 수용하고 있는 정치적 위계질서를 일종의 꿈에 불과한 것으로 단호하게 비판하고 있다. 노자는 국가 지향적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국가주의 철학자였고 장자는 민중과 아나키즘을 지향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주의 철학자인 노자와는 확연히 다른 노선을 표방했던 장자의 철학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망각과 연결의 실천 철학이다. 망각과 연결은 소통(疏通)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소(疏)는 '막힌 것을 터버린다'를 의미하고 통(通)은 새로운 연결을 뜻한다. 즉, 장자의 '소통'은 기존의 고정된 삶의 형식을 망각과 비움을 통해 극복하여 나와 다른 삶의 형식을 갖는 타자와의 새로운 연결을 모색하려는 의지를 반영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소통을 가장 잘 설명하는 에피소드로 '수영 이야기'가 있다. 공자는 땅에서의 삶을 가장 잘 영위한다고 정평이 난 사람이다. 그런데 땅의 고수인 공자가 어느 날 육지의 가장 끝, 험악한 폭포수(물)의 영역에 이르게 된다. 자신의 삶의 기술이 무력해지는 이곳에서 공자는 또 다른 고수 한 명을 만나게 된다. 그 고수는 물에서의 삶이 가장 편하다고 느끼는, 다시 말해 수영의 달인이었다. 공자는 그에게 묻는다. "물을 건너는 데 그대는 어떤 특이한 방법이라도 지니고 있는가?" 물의 고수는 이렇게 말한다. "특별한 방법이 있겠습니까? 나는 옛 삶(故)에서 시작하였고 지금의 삶(性)에서 자라났으며 운명(命)에서 완성하였습니다. 물이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저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나를 물속에서 밀어내면 저도 같이 그 물길을 따라 나옵니다. 물의 도를 따라서 그것을 사사롬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물을 건너는 방법입니다." 그러자 공자가 다시 묻는다. "옛 삶에서 시작하였고, 지금의 삶에서 자라났으며, 운명에서 완성하였다고 그대는 말했는데 무슨 의미인가?" 물의 고수는 대답한다. "제가 육지에서 태어나서 육지에 편안해진 것이 옛 삶이고, 제가 현재 물에서 자라서 물에 편안해진 것이 지금의 삶이며,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된 것이 바로 운명입니다." 수영의 달인은 원래 땅에서의 삶에 익숙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땅과 전혀 다른 규칙으로 흘러가는 물을 만나게 된다. 이 때 땅에서의 방식(선입견)만 고수하고 물을 대하면 물 속에서 허우적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땅 생활에서 축적된 선입견을 버리고(잊고/비우고) 물에서의 새로운 방식을 몸으로 익혀 나갈 경우(연결) 물을 땅과 같이 익숙하게 느낄 수 있고 유유히 물 속에서 수영을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의도하지 않은 채 세상에 태어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특화된 삶의 방식을 몸에 붙인 채 살아간다. 이는 일종의 선입견으로 굳어지면서 다른 공동체에 속한 타자를 만날 때도 그 방식(선입견)을 강요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인생에서 끊임없이 겪게 되는 타자와의 마주침을 파괴적이지 않고 생산적인 모습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선 자신이 갖고 있는 한계에 기반한 자신만의 선입견을 과감히 버리고(잊고/비우고) 타자의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필사적인 연결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장자가 타자와의 소통이라는 난해한 주제를 사유했던 철학자라는 저자의 해석이 매우 신선하다. '타자'라는 개념을 사람으로 한정 짓지 않고 세상 만물로 확대 적용했다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장자의 윤편(輪扁) 이야기도 압권이다. 환공이 회당 높은 곳에서 경전을 읽고 있었고, 윤편은 회당 낮은 곳에서 수레를 깎고 있었다. 윤편이 환공에게 물었다. "공께서는 지금 무슨 말들을 읽고 계십니까? 환공이 "성인의 말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윤편이 "그 성인은 살아 있습니까?"라고 묻자 환공은 "그는 죽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윤편은 말했다. "그렇다면 공께서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옛 사람들의 찌꺼기가 아닙니까?" 그러자 환공이 말했다. "수레바퀴나 깎는 장인인 주제에 네가 지금 경전을 논하려 하는가!" 그러자 윤편이 말했다. "저는 그것을 제 자신의 일에 근거해서 본 것입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엉성하게 작업하면 헐렁해져 견고하게 되지 않고, 꼭 끼게 깎으면 빠듯해서 서로 들어맞지 않습니다. 엉성하지도 꼭 끼지도 않게 작업하려면 저는 그것을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입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제가 제 아들에게 전달할 수 없고 제 아들도 저에게서 배울 수 없는 기술이 있습니다. 이것이 나이 70이 되도록 제가 직접 바퀴를 깎고 있는 이유입니다. 옛 사람은 자신이 전할 수 없는 것과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공께서는 지금 옛 사람들의 찌꺼기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윤편은 자신을 비우고 자신이 직접 수레바퀴가 되어서 수레바퀴를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하면서 수레바퀴와 일종의 소통을 한 셈이다. 그런데 몸과 마음으로 터득한 수레바퀴와의 소통을 언어라는 형식으로 아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고백을 한다. 마찬가지로 성인들은 자신이 살았던 시공간에서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데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고 타자와 직접 소통하면서 얻은 깊이 있는 깨달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바로 옆에 앉혀 놓고 침을 튀기면서 설명을 해줘도 깨달음의 전달이 여의치 않을텐데 곡해의 여지가 심각한 언어로 달랑 남기고 죽었다면 그 경전은 후세 사람들이 읽고 바로 적용하기엔 사실상 불가능하다란 얘길 윤편은 "경전이란 성인의 찌꺼기에 불과하다"란 말로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장자는 계급상의 높낮이는 아무 의미가 없고 오직 누가 소통을 잘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정말 멋진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장자의 사상을 압축한 구절로 道行之而成(도행지이성)을 들 수 있다. 직역을 하면 "도는 걸어가야 이루어진다."가 되는데 저자는 바로 이 구절에서 노자의 道와 장자의 道가 전혀 다른 컨셉을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노자의 道는 세상만물의 시작부터 존재하는 만물의 근본이치를 의미하는 반면 장자의 道는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항상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결국 소통하는 만큼 길이 열리는 것이고 길이 열린 만큼 道가 이뤄진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타자와의 마주침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를 비우고 타자와 연결한다'가 말이 쉽지 어디 그리 만만한 일인가? 나를 비운다는 것도 큰 도전이고 타자와 연결한다는 것도 큰 도전이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날들을 돌이켜 보아도 나를 비웠던 적은 거의 없고 내가 가진 선입견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판단하기만 했던 것 같다. 그러니 타자와의 연결도 그리 매끄럽지 않았던 것 같고... 최근 블로깅을 하면서 다른 블로거들과 덧글과 트랙백을 주고 받는 경험을 하고 있는데 금번 독서를 통해 장자의 지혜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앞으로의 블로깅에 많은 도움을 줄 것 같다. 내가 가진 지식은 분명 내가 처한 시공간적 한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을테고 내 블로깅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지식을 내가 충분히 배울 수 있게 나를 비우고 적극적으로 다른 블로거들과 지식을 교류한다면 장자가 말한 道行之而成을 조금이나마 실천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블로깅 뿐만 아니라 가정,직장,친목 관계에서도 소통의 기본자세인 망각(비움)을 몸에 붙이는 훈련을 착실히 쌓아 나가야 할 것 같다. 그래야만 연결을 예전보다 많이 할 수 있을테니...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을 읽는 내내 생각의 탄생이란 책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생각의 탄생에서 제안하는 생각의 13가지 도구를 한 단어로 압축하면 바로 소통(疏通)이 아닐까 싶다. 무엇인가를 관찰하고 형상화/추상화하고 패턴을 인식/형성/유추하고 몸으로 생각하고 감정이입하고 차원적 사고,모형 만들기, 놀이를 하고 변형/통합하는 것은 결국 무언가와의 소통을 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를 비우고 대상과 나를 연결하는 것... 생각의 탄생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은 소통을 통해 道行之而成(도행지이성)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장자의 사상이 내가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들뢰즈의 리좀과 매우 닮아 있어서 반가웠다. 어쩌면 들뢰즈의 리좀과 닮아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이 책을 샀는지도 모르겠다. 오랜 세월을 거쳐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며 첨단을 달리고 있는 21세기 현대물리학이 기원전 반야심경과 조우하듯이 고민에 고민을 더하며 사유 여행을 거듭하고 있는 서양철학이 결국 기원전 200~300년에 활동했던 장자와 조우하고 마는건가... ^^ 저자가 멋지게 재해석한 장자의 소통(疏通) 철학은 내게 매우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의외의 인물에게 소통이란 개념을 배운 셈인데 그 배움은 앞으로의 내 삶에 큰 영향을 줄 것 같다. 장자의 철학 공식: 忘却 + 連結 = 疏通 → 道行之而成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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