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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 :: 2014/05/16 00:06


설문조사를 해보면 어떨까?

내가 나에게 설문조사를 말이다.

설문조사를 받아본 적은 많지만, 직접 설문조사를 시행할 기회는 많지 않다

진심으로 나를 대상으로 내가 설문조사지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정말 나에게 마음을 다해 뭔가를 물어본 적이 있는가?

가장 많이 물어봐야 할 대상은 아마도 나일 텐데 나에게 너무 안 물어보는 건 아닐까?

내가 나에게 설문조사를 하게 된다면,

아마도 천편일률적이고 판에 박힌 진부한 설문조사지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정말 나를 위한 나만의 설문들이 만들어질 것이고

그 설문이 나로부터 나를 향해 전달되는 순간,'

나는 나와의 거리를 형성하게 되고

거리를 매개로 한 설문과 응답을 통해 나는 나와 정식으로 대화하게 된다.

정색을 하고 얘기하다 보면 나A는 나B를 이해하고, B는 나A를 학습하게 된다.

나와 나 사이의 거리, 나와 나 사이의 대화, 나와 나 사이의 이해와 학습.

설문조사지 1장으로 얻어낼 수 있는 엄청난 서사라고나 할까.

이런 스토리가 설문조사 부재로 인해 물밑에서 잠자고 있다쿨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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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 2014/03/03 00:03

1년 전의 나는 나인가?

10년 전의 나는 나인가?

시간이 흘러갈 때 나는 어떤 계기로 인해 변화한다. 
시간이 흘러갈 때 나는 나만의 것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을 견디면서 변하지 않는 것들은 나의 정체성을 구성한다.
시간의 흐름에 휩쓸리면서 변하는 것들은 나의 정체성을 직조한다.

변하지 않는 것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로 부각될 수록 나의 정체성은 선명해지고 흐려진다.
변하는 것들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갈 수록 나의 정체성은 명징해지고 흐릿해진다.

나를 구성하는 것들이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변화하는 것들과 변하지 않는 것들의 조합을 이뤄나가면서
10년 전의 나, 1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 같은 듯 다른 듯 변주된다.

나는 누구인가?

1년 전의 질문도
10년 전의 질문도
오늘 이 순간 새롭게 답변된다.

1년 전의 나는 이 순간 새로운 나로 탄생하고 있고
10년 전의 나는 내일 어느 순간 새로운 나로 태어날 것이다.

정체성.
그건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것이고
지금 이 순간 아는 듯 모르는 듯 나의 주위에서 자욱하게 호흡하고 있는
태연한 안개와도 같은 것인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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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아크몬드 | 2014/03/03 04:07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정체성... 일터가 끼치는 영향이 크더군요.
    편집자에서 IT엔지니어로 전향합니다. 새로운 시작과 함께 좋은 기회가 오리라 믿고 있습니다.

    • BlogIcon buckshot | 2014/03/03 09:20 | PERMALINK | EDIT/DEL

      일터가 정체성에 영향을 주고
      정체성이 일터에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시작 축하드리구요.
      행복한 한 주 보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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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인간 :: 2014/01/13 00:03

가끔 IPTV를 본다.

본방사수를 거의 하지 않고
1개월이 경과된 프로그램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본다.

그렇게 하다 보니 1개월이란 시간의 지연이 자연스럽게 프로그램의 퀄리티를 필터링하게 된다.
시간을 견디는 프로그램만 골라서 보는 습관을 들이는 자는 시간의 공격을 견딜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시간을 견디는 것들을 가까이 하다 보면, 시간의 흐름에 수동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시간을 자신 만의 체계로 재구성할 수 있게 된다. 1개월 후의 시점으로 이동할 수도 있고, 1년 후의 지점으로 훌쩍 날아갈 수도 있다. 심지어는 나의 생명기간의 범주를 뛰어넘는 미래와 과거로 순식간에 진입할 수도 있다.

나 자신이 시간을 닮아가는 것.

시간을 타자로 바라보지 말고 내가 곧 시간이라고 간주하면, 많은 것들이 명확해진다. 내가 좋아하는 책, 내가 좋아하는 영화, 내가 좋아하는 제품, 내가 좋아하는 생각, 내가 좋아하는 행동. 이 모든 것들을 '시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것들의 본질을 어렴풋이 엿볼 수 있게 된다.

나는 가끔 IPTV를 본다. IPTV를 보면서 나는 시간이 된다.

인간이 시간이 되는 놀이.

그리고 나는 나를 바라본다. 시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순간이다.

본방사수를 하지 않고 1개월이 경과된 '나'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나다움'으로 접수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1개월이란 시간의 지연이 자연스럽게 나의 퀄리티를 필터링하게 된다.
시간을 견디는 '나'만 골라서 접수하는 습관을 들이는 나는 시간이 되고 시간은 내가 된다.

IPTV는 나에게 '시간 인간' 개념을 알려주었다.

IPTV는 시간 기계이고 나는 시간 인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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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탄생 :: 2013/12/13 00:03

단 3개의 포스트에 불과하지만, '시선'이란 단어가 제목에 들어간 포스트를 3개 갖고 있다는 것이 내가 2013년의 나를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 같다.

시선과 거리
시선과 시선
시간과 시선


특히 시선과 시선이란 포스트를 올해 1월16일에 적을 수 있었던 건 내게 큰 행운인 듯 하다.

나의 생각 여정은 시선과 시선 포스트를 올리기 전과 올린 후로 나뉜다.  이 포스트를 적은 후로 다양한 시선을 접하기 위한 노력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고 그런 노력들이 당장 가시적인 결과로 나타나진 않았지만 내 안에 차곡차곡 축적되는 모습으로 나의 생각은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전에 내가 얼마나 편협한 시선의 굴레에 갇혀 있었는지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내가 갇혀 있던 시선의 프레임을 인지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 얼마나 값진 경험인지 알게 되었고 그런 배움을 통해 다른 시선을 알고자 하는 시선 시뮬레이션 여행을 다채로운 모습으로 떠날 수 있는 기회를 극적으로 획득하게 된 것에 감사했다.

돌이켜 보면 2013년 1월16일에 적은 아래 포스트가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꽤 오래 전에 적은 것 같은데 불과 올해 초였다니. ^^

시선과 시선

물고기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어떨까? 광물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어떨까? 독수리의 시선은? 치타의 시선은? 개미의 시선은? 시선 놀이만큼 재미 있는 게 세상에 또 있을까?  본다는 것은 나를 규정하고 나를 규정하는 프레임을 설정하고 나를 규정하는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것이다.특정 시선을 갖고 객체를 바라보는 주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규정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규정되는 '나'에 의해 시선은 형체를 띠는 것이고, 규정된 나에 의해 형성되는 시선은 지속적으로 규정된 '나'를 강화시킨다. 뭔가를 보는 것은 대단히 후행적인 사건이다. 이미 그전에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세팅되어 버리는 것이고 그렇게 일사천리로 정해진 규격이 이후에 전개되는 대부분의 프로세스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주체는 뭔가를 보면서 시선이 생성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실은 시선은 지극히 전면적인 전처리 과정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유형의 시선이 존재한다. 또한 특정 유형의 시선들도 저마다의 독특한 시선 특성을 지닌다. 특정 유형의 시선을 탑재하는 건 세상을 향해 오롯한 선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넓디 넓은 세상을 선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매우 과감하고 무모하고 어이없는 치기 어린 행위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게 수많은 유형의 시선에게 부여된 냉정한 현실인 것이고, 시선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가공할만한 한계성을 그닥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부여된 가냘픈 '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게 된다.하지만, 부여된 툴이 너무 빈약하기만 하진 않다. 선은 홀로 존재하면 너무도 취약한 상태에 불과하지만 선과 선이 교차하는 순간 선은 면의 가능성을 지니게 되고 선과 선과 선이 만날 때 입체의 잠재성을 발할 수 있다. 문제는 '선'의 한계성이 아니라, 자신에게 부여된 '선'에만 갇히는가 아니면 다른 선과의 만남을 즐길 수 있는가이다. 물고기의 시선이 독수리의 시선과 만날 때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날까?  광물의 시선과 인간의 시선이 만나면 어떤 면이 탄생하는가? 치타의 시선과 개미의 시선과 박테리아의 시선이 만나면 어떤 입체가 만들어질까? 하나의 시선이 만들어지기 위한 무수한 전처리 과정은 특정 시선을 매우 협소한 궁지로 몰아넣는 경향이 있으나 시선과 시선이 만나서 이뤄내는 무수한 가능성은 거대한 후처리 과정을 낳게 된다. 그리고 난 후에 발생하는 전처리 과정과 후처리 과정의 연결. 여기서 시선은 거대한 도약을 하게 된다. 시선과 시선. 그 거대한 매치메이킹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시선을 지닌 자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물고기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어떨까? 광물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어떨까? 독수리의 시선은? 치타의 시선은? 개미의 시선은? 시선 놀이만큼 재미 있는 게 세상에 또 있을까? ^^


그리고 위 포스트는 2011년 12월7일에 적었던 아래 포스트와 궤를 같이 한다.

점, 선, 면, 입체, 그리고..

A는 점에 머무는 자였다. A는 점이 항상 답답했다. 항상 한 자리에 멍하니 머물러 있는 자신이 바보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유를 꿈꿨다. 어디로든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움직이고 싶었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보고 싶었다. A는 점을 자신의 한계라고 생각했고 점이 자신을 구속하는 한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A를 둘러 싼 공간은 점에서 선이 되었다. A는 너무나 기뻤다. A는 선 상에서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예전 점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자유감을 맛 볼 수 있었다. A는 선이 새롭게 열어준 진보된 세상 속에서 사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어느 날 A를 둘러 싼 공간은 선에서 면이 되었다. A는 이전의 '선' 시절을 까맣게 잊고 면이 선사하는 꿈같은 신천지를 마음껏 누비고 다녔다. 면에서 생활하다 보니 과거의 선 생활을 돌이켜 보면 너무 끔찍하단 생각이 들기조차 했다. 도대체 선에서의 생활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젠 예전 선 생활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어느 날 A를 둘러 싼 공간은 면에서 입체가 되었다. A는 이제 모든 것을 얻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 나의 세상은 완성이 되었구나. 이제 나는 이 놀라운 세상 속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겠구나. 예전의 면, 선, 점에서의 생활은 이제 나에겐 흐릿하게 잊혀져만 가는 원시적 과거에 불과하겠구나. A는 입체 속을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꿈만 같았다. A는 입체에 머무는 자가 되었다. 그런데.. A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A가 머물고 있는 입체는 아주 오래 전에 A가 머물던 점 속에 잠재하던 수많은 가능성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결국 점은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빅뱅 이전의 공(空)과도 같은 상태였다는 것을.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면이 되고 면이 입체가 되는 과정은 발전이 아닌 단지 점이 추는 가벼운 춤에 불과했다는 것을. 결국 A가 머물고 있고 A가 너무도 자랑스러워 하는 '입체'는 점을 너무도 그리워하고 있고 언젠간 꼭 점이 되고 말리란 꿈을 단 한시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난 행복하다.
2011년의 점, 선, 면, 입체, 그리고.. 포스트가 있어서.
2013년의 시선과 시선 포스트가 있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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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빚 :: 2013/10/18 00:08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적정한 수면량이 있다. 적정량의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그것은 고스란히 수면빚으로 체내에 축적된다. 그래서 자신에게 적합한 수면량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평상시에 잘 지켜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축적된 수면빚이 피로와 스트레스로 전환되어 결국 나를 괴롭히게 된다.

성찰도 마찬가지다.
적정량의 성찰을 꾸준히 수행하지 않으면 고스란히 성찰빚으로 체내에 축적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찰은 선택이 아니다. 필수다.
성찰을 하지 않으면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게 된다. 나의 눈은 바깥을 향해 있어서 끊임없이 나를 향한 성찰의 시선을 가져가지 않으면 나의 눈은 타인을 판단하고 타인을 오해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성찰에 일정 시간을 할애하지 않으면 나의 '관'은 자꾸만 편향성을 더해가게 되고 균형감각을 상실한 나의 프레임 속에는 왜곡된 쓰레기 정보들이 가득 유입되면서 나는 성찰을 엄두도 낼 수 없는 대규모 성찰 채무자로 전락하게 된다.

나에게 성찰빚이 얼마나 존재하는가를 체크하고 싶다면 아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된다.
"최근에 한 비판 중에서 나를 대상으로 한 비판이 몇 %나 되는가?"

만약 나를 향한 비판이 0%라면 성찰빚은 어마어마한 규모가 될 것이다. 나는 무조건 옳고 타인에 대해서만 비판의 잣대를 들이댔을 테니 말이다. 나를 스스로 꾸짖고 자발적인 반성을 최근에 한 경험이 없다면 성찰로부터 멀어진 일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성찰을 지속하지 않으면 성찰빚은 서서히 늘어나게 되어있고 늘어난 부채는 더욱 성찰로부터 멀어진 삶을 나에게 강요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적정한 성찰량이 있다. 적정량의 성찰을 지속적으로 취하지 않으면 그것은 고스란히 성찰빚으로 축적된다. 그래서 자신에게 적합한 성찰량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평상시에 잘 지켜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축적된 성찰빚이 삶의 품질 저하로 이어지면서 결국 나에게 독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삶의 품질 지수를 측정하고 싶은가?  분자를 분모로 나누면 된다.
  - 분자: 나를 성찰하고 나를 비판하고 반성한 것
  - 분모: 타인을 비난하는 마음을 먹거나 말을 뱉은 것

1을 훌쩍 넘는가?  아님 0으로 수렴하는가?  ^^



PS. 관련 포스트
정보의 분열, 행복과 욕심의 분리
제허, 알고리즘

로망과 속도, 그리고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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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력 :: 2013/10/11 00:01

경쟁사회.  모두가 경쟁을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 학생은 학교에서 경쟁하고 회사원은 회사에서 경쟁하고 자영업자는 필드에서 경쟁하고 부모는 육아시장에서 경쟁하고.. 모든 것이 화폐화 되어가듯, 모든 것은 경쟁격화의 양상을 띠고 흘러가고 있다. 그래서 모두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과도 같은 삶을 살아간다. 끊임없이 타인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타인의 모습을 의식하고 그 모습에 비친 나의 모습을 비교하고 조금이라도 앞서기 위한 노력을 치열하게 경주한다.

그런데.. 타인과의 경쟁에 몰입하면 경쟁력이 올라가는가?

아니다.

경쟁에 몰입하면 경쟁력이 떨어지기 쉽다.

'나'다움을 잃어버린 채 타인을 의식하며 사고/행동하면 경쟁력이 저하되고 그로 인해 더욱 타인을 의식하는 악순환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타인을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나'다움은 희석되고 나는 점점 범용품의 프레임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범용품 트랙을 타게 되면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하게 된다. 모두가 똑같은 모습의 상품으로 전락한 채 스펙으로 비교당하고 가격으로 저울질 당하고 성능으로 평가 받는 범용품 경쟁의 장. 솔직히 인간으로서 뛰어들지 말아야 할 아사리판 아닐까?

경쟁력은 경쟁하지 않을 때 생겨나기 쉽다.

범용품은 아무리 용을 써봐야 범용품이다.
나만의 프레임 없이 기계적으로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사뭇 허무하다.  예를 들어 돈을 남보다 많이 벌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돈을 왜 벌어야 하는 걸까?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나만의 이유가 있는가? 그냥 많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막연한 희망, 모호한 불안감 아닐까? '돈'을 나만의 프레임으로 바라보고 '나'다움이란 관점에서 돈을 정의하고 돈에 대한 나만의 입장을 정확히 세운 후에 돈에 접근해야 하는데 그저 남들이 돈을 종교처럼 추앙하니 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괜히 뒤쳐지는 것 아닐까란 근거 없는 동질화의 흐름 속에 나를 맡기는 모습.

레밍처럼 떼를 지어 영문도 모른 채 벼랑 끝으로 돌진하는 모습. 그게 우리 사회에서 횡행하는 경쟁의 양상인 듯 하다. 경쟁을 위해 경쟁하는 것이지 왜 경쟁해야 하는지에 대한 '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 없는 경쟁. 그러니 범용품으로 전락할 수 밖에.

사람이 범용품이 되어가는 건 참으로 슬픈 일이다. 심지어는 기꺼이 범용품이 되어 다른 범용품보다 단 한 발이라도 앞서야 안도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더욱 슬픈 일이다.

'경쟁'보다 더 중요한 건 '나다움'이다. 나다움이란 관점에서 경쟁을 바라보자. '경쟁'은 나를 소외시키면서 보람을 느낀다. 경쟁에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나는 나 자신을 소외시키면서 나다움을 잃어간다. 나다움은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에 투영된 나를 이해할 때 강화된다.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의 사고/행동의 이유를 알아갈 때 나를 이해하고 나의 사고/행동을 '나'스럽게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나다움'은 독고다이가 아니다.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자기발견의 과정이다. 반면, 경쟁은 타인에 대한 견제에 기반한 작동 시스템을 갖고 있다. 타인의 스펙과 나의 스펙을 비교하면서 타인에 뒤쳐지지 않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 그런 과정 속에선 타인과 나는 일제히 범용품으로 전락한 채 이전투구의 장 속에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가련한 존재로 낙인이 찍혀버린다. 경쟁의 본질은 타인에 대한 견제에 있고 나다움의 본질은 타인에 대한 배려에 있다. 경쟁 모델과 나다움 모델. 어느 쪽이 더 인간적인 모델이겠는가? 누구나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대응하는 일종의 모형을 갖고 있다. 경쟁 모형에 입각해서 살아갈 것인지, 나다움 모형에 입각해서 살아갈 것인지. 그건 전적으로 각 개인에게 귀속된 선택의 문제이다.

경쟁력이란 단어 자체에 이미 허상이 그윽하다. 경쟁력이란 단어를 자주 쓰다 보면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장땡이란 착각에 서서히 빠져들기 쉽다. 경쟁력이란 단어를 가급적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제부턴 새로운 단어를 입에 올려보면 어떨까?

경쟁취약성: 경쟁에 눈이 멀어 나다움을 잃어가기 쉬운 나약한 상태를 의미함

나의 경쟁력을 고민하기 보다 나의 경쟁취약성을 응시해보자.

나의 경쟁취약성은 어떠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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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아크몬드 | 2013/10/13 11:33 | PERMALINK | EDIT/DEL | REPLY

    발전하려면 열등감을 오히려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그것만이 아니네요. 재밌게 읽고 갑니다.

  • BlogIcon KimJY | 2013/10/18 09:23 | PERMALINK | EDIT/DEL | REPLY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BlogIcon buckshot | 2013/10/18 09:56 | PERMALINK | EDIT/DEL

      댓글 주셔서 오늘 아침 경쟁의 허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 되어 너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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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0/09 00:09

창밖 뉴욕
마테오 페리콜리 지음, 이용재 옮김/마음산책

창밖 풍경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창 너머 세상만큼이나
스스로를 드러낸다.


위 문장에 반해서 이 책을 구입했다.  그리고 읽는 내내 위 문장이 마음 속을 맴도는 것을 느꼈다. 

정말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 만의 창을 가지고 있고, 그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창 밖에 보이는 풍경은 사실 나의 밖에서 펼쳐지는 풍경이라기 보다는 나의 심상이 밖으로 투영된 또 하나의 '나'에 가까운 상이다.

창밖 풍경은 일종의 동적 캔버스이다. 그 위에 나는 나만의 그림을 그려간다. 기억이라는 게 저장된 정보가 아니라 끊임없이 소환되면서 재구성되는 동적 정보의 연결체에 가깝다면, 창밖 풍경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건 그냥 밖에 존재하는 고정된 광경이라기 보단 내가 시선을 줄 때마다 끊임없이 새롭게 소환되며 재구성되는 동적편집 정보의 집합체에 가까운 것 같다.

창밖 풍경에 대해 말하는 것은 창밖 풍경을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나의 마음 흐름'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건 외부에 대한 묘사가 아닌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것이 축적되는 과정 속에서 창밖 풍경은 더 이상 외적 존재가 아닌 나와 연결된, 나를 구성하는, 나를 설명해주는 그 무엇이 되어간다.

누구나 자신 만의 창밖 풍경을 갖고 있다. 그 풍경을 그냥 나의 밖에 존재하는 풍경이겠거니 여기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보면서도 그것이 자신인 줄을 모르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럼 '나'는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왜 나를 알아봐주지 못하는가? 도대체 언제 나를 알아봐줄까?

세상은 거대한 거울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언제 어느 곳에 머물든, 내가 언제 어느 곳을 스쳐 지나가든, 나는 해당 시공간에서 나를 응시하게 되어 있다. 나는 시공간을 흘러가면서 나를 끊임없이 만나는 재귀적 존재인 것이다.

지금 창밖 풍경이 어떠한가? ^^




PS. 관련 포스트
평가와 거울반사
미디어는 거울이다.
비난과 자성 사이
거울 리더십
존중 생산
시장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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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아크몬드 | 2013/10/10 18:28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제 창은 거대한 Windows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 마음 속 한자리에는 언제나... ㅎ

    • BlogIcon buckshot | 2013/10/11 09:27 | PERMALINK | EDIT/DEL

      한 편의 '시'와도 같은 댓글을 주셨습니다.
      넘 멋진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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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의 발명 :: 2013/10/02 00:02

TV를 보면 온갖 유형의 프로페셔널들이 나와서 자신 만의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돈은 프로페셔널을 중심으로 흐른다. 프로는 특정 영역을 점유하고 영역은 아마추어가 범접하기 힘든 장벽을 축조하면서 특유의 BM을 작동시킨다.

춤의 프로가 등장하기 전에는 누구나 춤을 출 수 있었다. 아니 누구나 춤을 추어도 쪽 팔리지 않았다. 하지만 춤이 전문 영역이라고 정의된 후부터는 아무나 춤을 추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림의 프로가 등장하기 전에는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림의 프로가 등장한 뒤로는 아무나 그림을 마구 그리면 안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프로는 아마추어에게 명백한 열등감을 부여했고 아마추어는 열등감을 몸과 마음 속 깊이 탑재한 채 프로의 퍼포먼스를 동경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프로는 아마추어의 눈을 모으고 모아서 그것을 돈으로 전환시켰고 아마추어는 프로에게 돈을 주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아마추어의 열등감은 프로가 돈을 벌 수 있게 하는 주요 메커니즘 중의 하나로 당당히 자리잡게 되었다.

열등은 경쟁 시스템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최고의 발명품이다. 열등감이 있기에 치열한 경쟁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그 시스템에 종속된 수많은 경쟁자들은 열등감과 우월감이란 환상을 최대한 실체에 가깝게 느끼며 열등 그룹에 속하지 않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우월 그룹에 들어갔을 때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프로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열등감 가득한 눈은 명백한 자기다움 포기의 선언이며 무기력해지겠다는 자기 주문이다. 프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떠해야 하는가? 이건 자존의 삶 관점에선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프로를 바라보는 나의 눈빛을 응시해 보자. 그 속에 열등감이 숨어 있는지, 프로의 퍼포먼스를 넘사벽이라고 생각하는지, 프로를 쳐다보는 나의 눈빛에서 돈이 흘러나오고 있는지.

나를 발견하고 나를 정의하고 내가 타인과 어떻게 다른지를 규정하고자 한다면, '열등'에 대한 스탠스를 명확히 해둬야 한다. '열등'은 보편적 인간 감정이 아니라 철저히 외부에서 주입된 화학약품과도 같은 것이다. 열등해서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열등해지도록 강요를 받고 그 강요에 자존적인 대응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게 되는, 아니 주입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린 경쟁에서의 높낮이에만 예민하게 반응하는 허상적 프레임 속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건 자존 관점에선 매우 마이너한 사항이다. 중요한 건 타인과 나를 구별시켜 주는 나만의 '고유성'이다. 중요하지 않은 경쟁에 몰입하고 거기서 이기기 위한 노력에만 집중하다 보니 점점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스스로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에 집중해야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건 '고유성'이고 그것에 집중하다 보면 속물적 관점의 경쟁 체제에서도 어느 정도의 결과를 낼 수도 있다.

'경쟁'은 '고유성'에 둔감해지라는 암묵적 압박을 끊임없이 가한다. 모두 똑같은 선상에서 동일한 게임 룰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플레이해서 랭킹을 매긴다. '고유성'에 민감해지기 위해서는 게임 룰 안에 함몰되지 않고 게임 룰 밖에서 게임을 응시할 수 있는 시선을 생성해야 한다.

프로가 이끄는 열등감의 세계로부터 흘러나오는 무기력감이 주는 멍청한 쾌락에 현혹되지 않고 나만의 특질이 무엇인지, 나는 어떤 차이를 만들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에 단 5분이라도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열등하지 않은데 열등을 수시로 강요 받고 스스로 무기력해지는 선택'을 중단하는 시간이 늘어갈 때 '열등'이란 최고의 발명품은 적어도 내 앞에서만큼은 하찮은 쓰레기로 전락해 갈 것이다.

열등이 나를 범용품으로 정의하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아님 내가 열등을 범용품으로 규정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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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아크몬드 | 2013/10/02 10:11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저보다 어린 분들이 높은 업적을 쌓은 모습을 가까이서 보게 되면, 나도 모르게 열등감에 휩싸이게 되더군요.
    " '열등'은 보편적 인간 감정이 아니라 철저히 외부에서 주입된 화학약품과도 같은 것이다. 열등해서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열등해지도록 강요를 받고 그 강요에 자존적인 대응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게 되는, 아니 주입 받게 되는 것이다."
    라는 구절에 새로움을 느끼고 갑니다. 비교할 수 없는 자신의 가치에 대해 눈뜰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좋겠습니다.

    • BlogIcon buckshot | 2013/10/02 23:18 | PERMALINK | EDIT/DEL

      '비교'는 도구일 뿐인데, 그게 목적이 될 때 문제가 심화되는 것 같습니다. 필요할 때에만 비교를 하고 빠져나와야 하는데 비교를 하다보면 비교 자체에 빠져버리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도록 '비교의 함정'에 대한 포스트를 종종 올리려 합니다. ^^

  • | 2013/10/16 12:35 | PERMALINK | EDIT/DEL | REPLY

    " '고유성'에 민감해지기 위해서는 게임 룰 안에 함몰되지 않고 게임 룰 밖에서 게임을 응시할 수 있는 시선을 생성해야 한다."
    정말 좋은 말이고 가슴에 와 닿는 말입니다. 요즘 지나친 경쟁과 열등감에 빠져 허우덕 대며 정신 못차리는 사람으로서 크게 와 닿네요..^^

    • BlogIcon buckshot | 2013/10/17 09:42 | PERMALINK | EDIT/DEL

      댓글로 격려해 주시는 만큼 '고유성'이란 단어를 더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네요.
      너무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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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과거이다. :: 2013/08/19 00:09

타임슬립을 소재로 한 영화,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어느 결정적 순간에 변화를 가하고 그 변화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종종 볼 수 있다. 참 현실성이 떨어지는 설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참 매력적 환상이 아닐 수 없다. 결코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되는 지점으로 돌아가서 그 곳의 결을 바꾼다니 말이다.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짜릿할까?

또한,
과거로 돌아가 과거 상황을 변형시키는 기적과도 같은 행위를
현실적인 방법으로 소화해 보면 얼마나 신선하고 재미있을까?

음..
이렇게 가정을 해보자.
현재를 과거(A)라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미래의 어느 시점을 현재(B)라고 설정해 보자. 그리고 A 시점에서 갈림길을 맞이하게 될 때, 그것이 B 시점의 내 모습을 일정 부분 형성하게 될 것임을 잘 인지하고 A 시점에서의 내 행동을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느낌으로 이끌어 보자. 현재를 살아가면서 미래로부터 과거를 찾아온 시간여행자의 태도를 습득해 보자.  

이건 단순한 가정이 아니다. 어쩌면 이게 보다 유효한 현실인지도 모른다. 현재에 모든 의미가 숨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재를 그냥 흘러가는 가벼운 시간 정도로 치부하고 그것을 어리버리 흘려 보내는 모습으로 살아가다 보면 현재에 부여한 의미의 희박함으로 인해 결국 시간의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는 안타까운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현재란 단어에는 수만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과거'이다. 현재는 과거이다. 현재를 과거로 규정하는 순간, 나는 현재라는 급류 속을 휘말리며 살아가는 무기력한 로봇이 아닌 미래의 어느 순간에서 괴력을 발휘하며 과거로 사뿐 내려 앉은 시간여행자가 되는 것이다. 현재를 과거로 규정한다는 것은 미래 어느 시점의 나의 모습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내가 경험해 온 시간의 궤적을 통찰하면서 향후의 내 모습을 프로젝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현재를 과거로 정의하는 순간, 나는 전혀 다른 맥락 속을 살아가는 존재로 심대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여행이란,
'현재'를 얼마나 의미 있게 바라보고 '현재'에 어느 정도까지의 기적을 부여할 수 있는가에 의해 경험의 깊이가 좌우되는 놀이인 것 같다. '현재'를 다루는 능력이 시간여행의 양상을 정의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세상은 나눠지는 것이겠고.

현재를 과거로 간주하고 미래로부터의 과거 여행을 즐겨보자. 이렇게 설레는 여행이 또 어디 있을까? 이런 여행을 수시로 즐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재를 그저 화살처럼 빠르게 질주하는 시간의 흐름 정도로 간주하고 현재를 대하는 무기력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나의 모습은 얼마나 서글픈 것일까?

현재는 과거이다.
미래는 현재이다.
그리고 나는 미래로부터 과거로 훅 날아온 시간여행자이다.
이건 상상도 설정도 아닌 마법과도 같은 '사실' 그 자체이다. ^^



PS. 관련 포스트
현재는 행복이다.
시간 속의 나
역주행을 통한 시간놀이
쓰기, 잊기, 읽기,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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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이현석 | 2013/08/19 01:07 | PERMALINK | EDIT/DEL | REPLY

    현재를 살아가면서 미래로부터 과거를 찾아온 시간여행자의 태도. 미래의 자서전이나 미래의 이력서를 오늘 쓰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 볼 수 있겠지요? 예전에 생각은 해봤지만 실천은 못했었는데, buckshot님 덕분에 다시 실천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BlogIcon buckshot | 2013/08/19 09:37 | PERMALINK | EDIT/DEL

      기억 뿐만 아니라 시간도 끊임없는 편집의 대상인 것 같습니다. 기억편집, 시간편집은 인간의 평생 놀이감인 것 같아요. ^^

  • BlogIcon 아크몬드 | 2013/08/19 09:17 | PERMALINK | EDIT/DEL | REPLY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최근 많네요. 1,2년 전만 하더라도 매사에 시간이 아까워 발을 동동 구르고 머리속과 뱃속을 터질듯이 채우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요즘은 또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시간을 아깝게 날려 보낼 때가 많은데요, 이러한 시간 소비의 균형을 맞추는 마음가짐에 대해 한번 언급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BlogIcon buckshot | 2013/08/19 09:52 | PERMALINK | EDIT/DEL

      일상 속 시간, 일상을 벗어난 시간.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균형점을 지속적으로 튜닝해나가는 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 쪽으로 치우칠 수도 있고 양 쪽의 균형이 잘 잡힐 수도 있고 다양한 양태를 보이게 될 것 같은데요.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시간은 의미있게 흘러가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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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십란을 대하는 태도 :: 2013/08/14 00:04

타인의 이야기?
뉴스 가십란엔 수시로 황당한 사건,사고들이 실린다. 그것을 보면서 마치 남의 일인 양 그것을 비웃고, 씹는 행위는 일상 속에서 흔히 경험되고 있다. 그런데 가십란에 올라오는 사건/사고들이 나와 완전 무관한 남의 일이기만 한 것일까? 과연 그럴까?  인간이 아무리 뛰고 날아봐야 거기서 거긴데 말이다. 그것과 나와의 공통점을 찾고 그걸 성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게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자각하는 것.
남의 일이라 여기고 그것을 나로부터 분리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바로 나의 속성 중의 하나가 발현된 거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어떤 사건/사고가 발생하더라도 내 안에 그것의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결국 타인의 일이라 여겨질 수 있는 것 속에 나와 같은 뭔가가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것, 외면하지 않는 것.

저마다 다르면서도 결국 모두가 같을 수 밖에 없는 포괄적 동질성.
인간은 각기 자신 만의 DNA 구조를 갖고 태어나 자신 만의 환경 속에서 자신 만의 삶의 경로를 걸어간다. 모두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래 봐야 결국 하나일 수 밖에 없다는 것.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저마다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라고 남의 일처럼 거리를 두고 언급하지만 실은 그게 나 자신의 모습이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모두가 같은 삶의 질곡 속에서 거대한 흐름의 형태로 휩쓸려 가고 있다는 것.

내가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
그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아닐까.

존재로 작동하려면
존재의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
인정하기 어려운 그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존재는 작동하기 시작한다.

인간답지 않은 사건,사고를 타인의 것이 아닌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걸 애써 외면하고 망각하지 않고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그걸 인생 막바지에 가서 인정하려 하니까 인생이 추해지는 거다. 그걸 지금 당장 인정하면 된다. ^^



PS. 관련 포스트
객관의 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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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 :: 2013/08/02 00:02

불확실성은 두려움을 낳고 불안을 낳는다. 인간은 두려움/불안에 매우 취약하다. 그래서 인간은 불확실성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이 있다. 사실 불확실성은 가치 중립적 개념인데도 말이다. 불확실성을 직시하고 그것이 긍정의 불확실성과 부정의 불확실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불확실성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도 있겠다.

불확실성을 논의하기 이전에 인간 상태 자체부터 먼저 짚어 보자. 누구나 매일 잠을 자고 매일 잠에서 깨어난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나의 상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어제 잠들기 전과 비슷한 몸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일 경우다. 몸은 서서히 노화하기 때문에 하룻밤 사이에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나진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미 있는 태도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의 상태를 어제의 나와 비교하는 것. 그게 맞는 건가? 오늘 아침의 내가 어제 밤의 나와 똑같아야 하는 법이 있는가? 어제와 오늘의 나를 단절시켜 놓고 오늘의 나를 '무(無)'와 비교해 보자. 불확실성의 시대를, 아니 불확실성이 원래부터 가득했던 세상을 살아가면서 왜 어제 잠들기 전의 나와 오늘 아침 깨어난 나 사이에 연속성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아침의 나를 어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나가 아닌 '무'에서 홀연히 등장한 놀라운 '유'로 규정하면 안 되는가? 사실 어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오늘의 나 자체가 충격이고 기적 아닌가?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건지 궁금하지 않은가? 



인간은 수시로 디폴트를 체크하며 현재 상태를 살핀다. 항상 기준점을 필요로 하면서 수시로 자신의 상황을 비교할 대상을 찾는다. 그런데, 그건 인간 인지력의 나약함을 더욱 강화시킬 뿐이다. 비교하면 할수록 자신에 대한 판단력은 약해진다. '나'는 그저 나일 뿐인데 자꾸 나를 뭔가와 비교하는데 몰입하면 '나'는 흐릿해져만 가고 흐릿해진 나를 바라보며 점점 불안감은 증폭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꾸 뭔가를 디폴트로 규정하고픈 본능을 살짝 눌러주면서 디폴트 '무'의 법칙을 서서히 몸으로 익혀 보자. 오늘 아침 깨어난 나의 모습을 디폴트 '유'(어제 잠들기 전의 나)와 비교하지 말고 디폴트 '무'와 비교해 보자. 불확실성에 디폴트 '무'의 법칙으로 대응해 보자. 그럼 불확실성은 사실상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린다. 불확실성은 디폴트 유의 법칙이 강력하게 작동할 때 권력을 갖는 것이지 디폴트 무의 법칙을 인간이 활용하는 순간부터 불확실성은 거대한 불안/공포에서 왜소한 역동성 정도로 리포지셔닝될 것이다. 



핵심은,

인간의 뇌리를 환영처럼 지배하는 개념을 객체화시키면 모든 것이 자명해진다는 것.

나는 알아가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시 하는 일상들의 흐름이 내겐 기적과도 같은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현재의 자신과 대비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나는 그게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것. 나의 현재는 '무'와 비교되어야 하는 긍정적 충격이라는 것을. 나는 항상 충격과 기적 속을 살아가는 것이다.
긍정적 충격과 기적이 내 안에서 수시로 작동하고 있는데 뭘 불안해 하는가? 세상에 만연한 불확실성보다 훨씬 역동적인 시스템이 내 안에 있는데 나는 그렇게도 파워풀한 것을 들고서 왜 덜 파워풀한 것에 기가 죽는가?

디폴트 '무'와 항상 나를 비교하자. 그럼 불확실성이 매우 순한 어린 양처럼 보일 것이다. ^^




PS. 관련 포스트
욕망은 수동태이다.
불확실성, 불안, 그리고 BM
예측, 알고리즘
극단,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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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시간 :: 2013/07/19 00:09

시간은 흘러간다. 하염없이 흘러간다. 정신줄을 놓고 있으면 시간은 나와는 상관없는 듯 그냥 흘러간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의 의식을 날카롭게 정립하고 흐르는 시간의 조각들에 의미를 새길 수 있다면 시간은 마냥 흘러가진 않고 내가 부여하는 의미와 어우러지면서 나와의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은 많다. 그래서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해야 하는 것을 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흘러간다. 해야 하는 것들이 밀리게 되면 시간은 참 허망하게도 흘러간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밀린 일들이 줄어들긴 하겠지만 그만큼 소비되어 버리는 시간들 속에서 나는 점점 흐릿한 존재가 되어간다는 느낌이 들기 쉽다.

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 특정 시간대에 가치를 부여하고 싶다면, 뭔가에 떠밀려 시간을 보내지 말고 그 시간대를 놓치면 안 되는, 그 시간대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정의하고 그것을 실행해야 한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닌 의미를 생성하는 시간.

정의하지 않으면 정의 당하고, 관찰하지 않으면 관찰 당하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의미를 부여 당한다. 시간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수동적 스탠스는 시간에 의해 삼킴을 기꺼이 당하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명이다. 나를 감싸며 포진하고 있는 시간을 관찰하고 그것의 의미를 정의하고 시간의 결에 나의 정체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자세를 시간에게 전달하면, 시간은 섣불리 나를 삼키려 하지 않고 내 곁에 살포시 다가와 나의 친구,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시간을 대하는 나의 눈빛이 시간이 나를 대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우린 대부분의 시간을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되는 것들을 하면서 보낸다.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할 수 있겠으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내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충분히 대체 가능한 일이다. 나만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보내는 시간. 그게 내 시간이다. 만약 내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100%를 타인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보낸다면, 나는 타인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냉정하게 나의 시간을 리뷰해 보자. 내가 보낸 시간의 몇 %가 나의 시간인가? 만약 0%란 답이 나온다면? 끔직한 상황 속을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시간. 나의 시간. 단 1%라도 그런 시간을 확보해 보자. 그건 나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그 선물은 나의 의지와 선언으로 형상을 띠기 시작하고 나의 결행으로 실현된다. 나의 시간을 보내는 그 순간, 나는 시간과 온전히 마주한 채 '나'라는 정체성을 시간에 투사하게 되고 시간은 대체될 수 없는 '나'를 온전히 마주한 채 시간의 결을 '나'에게 새기게 된다. 시간 속에 투영된 나, 나에게 새겨진 시간. 나와 시간이 마주보면서 생성되는 유니크한 '나-시간'의 링크. 나의 시간은 그렇게 창조된다.

시간은 흘러간다. 하염없이 흘러간다. ^^



PS. 관련 포스트
새벽을 정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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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3/07/19 10:57 | PERMALINK | EDIT/DEL | REPLY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BlogIcon buckshot | 2013/07/19 20:52 | PERMALINK | EDIT/DEL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는 게 불가능하지만 흘러가는 시간을 느끼는 건 언제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시네요. 귀한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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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소설 쓰기 :: 2013/06/28 00:08

읽는다는 것은 결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읽기'는 정보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몸소 실천에 옮겨볼 필요가 있다. 책을 읽을 때 생각의 결이 저자가 제시하는 특정 경로 만을 따라서 수용적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자연스럽긴 하지만 그런 수동적 읽기 패턴을 의심하고 독자적인 사고를 수행하는 독자 모드로의 전환을 조금씩 익혀나갈 수 있다면 읽기는 또 하나의 쓰기로 변신할 수 있다.

소설을 읽을 때, 다음엔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란 궁금증을 갖고 읽게 된다. 앞으로 펼쳐질 서사의 흐름은 작가가 갖고 있는 특유의 생각 결에 전적으로 의지될 수 밖에 없다. 생각의 결은 사람마다 고유한 것이어서 타인에게 그것이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한 편으론 타인에게 은근한 거부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결은 그저 결일 뿐이다. 그건 정답도 아니고 오답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을 때 설정되는 저자와 독자와의 관계는 은근 선생과 학생 간의 관계와 유사한 것이어서 독자는 저자가 전개하는 서사의 흐름을 무방비 상태로 주입 받곤 한다. 물론 저자의 결이 소설을 끌고 나가는 것이지만 그 소설을 읽는 독자의 지분이 과연 미미한 수준에 그쳐야 하는 것일까? 저자와 독자와의 관계는 어떤 모습으로 설정되어야 하고 거기서 독자의 비중은 과연 몇 %여야 하는 걸까?

저자의 결은 저자의 결일 뿐이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저자가 제시하는 서사의 흐름을 결코 인정할 필요가 없다. 만약 어느 시점에서 저자가 이끄는 스토리라인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않게 되었거나 다른 생각의 결이 자꾸 뇌리를 간지럽힌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스토리라인을 창발시킬 분사 모드로의 전환을 모색할 수 있겠다. 저자의 서사는 그저 참조만 하는 것이고 독자의 서사가 독자적인 결을 형성하면서 저자의 서사를 대체해 나가는 저작의 흐름을 타기 시작하는 것이다.

소설에 적혀 있는 내용을 단지 한 가지 경로일 뿐이라 여길 수 있다면 소설을 읽다가 어느 시점에서 소설과 결별하고 소설과 독립된 경로를 구축해 나가는 나만의 소설을 써 내려갈 수 있겠다. 또는 소설을 다 읽고 나서 그 소설에 착안한 또 하나의 소설을 쓸 수도 있겠다. 중요한 건 하나의 소설을 하나의 트랙으로 간주하고 그 소설을 가능케 한 심층기반에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소설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인 나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또 하나의 소설이 생성될 수 있음을 기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 모두는 소설가이다. 우리 안엔 나만의 스토리가 무수히 많은 생각의 결 속으로 숨겨져 있다. 그것들은 수시로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횡단하며 우리에게 자신을 알아봐 달라고 신호를 보내나 우리가 그걸 인지 못하거나 설사 인지했더라도 그걸 망각할 뿐이다. 결국 네비게이션의 문제이다. 자동차만 네비게이션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의 생각, 우리의 예술가적 재능엔 네비게이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나만의 생각 결을 나만의 텍스트로 형상화하는 네비게이션 플랫폼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나의 기억과 망각을 수면 위아래로 춤을 추게 하고 나의 끼와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나만의 경로 관리 기술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예전엔 독자가 저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독자는 반드시 저자가 되어야 한다.
독서의 끝은 수천 권,수만 권을 읽었다는 포만감이 아니다.
독서의 끝은 '독자의 저자 되기'이다. ^^



PS. 관련 포스트
독저, 알고리즘
위키 독서
독서와 구원등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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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아크몬드 | 2013/06/28 00:41 | PERMALINK | EDIT/DEL | REPLY

    편집 일을 배우는 입장에서, 많이 공감합니다.
    좋은 콘텐츠를 가진 분이면 얼마든지 저자가 될 수 있는.. ^^

    • BlogIcon buckshot | 2013/06/28 09:18 | PERMALINK | EDIT/DEL

      결국 모두에게 좋은 컨텐츠가 있는 것이고, 그걸 발견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

  • BlogIcon 고구마77 | 2013/06/28 14:31 | PERMALINK | EDIT/DEL | REPLY

    오랜만에 뵈요. 잘지내시죠?

    저는 요즘 영어공부하는 페북 페이지 돌보느라 개인 블로그를 할 시간을 못찾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맥락과는 좀 다르지만, 여튼 독자의 저자되기 일환으로 최근 카카오페이지 론칭 준비를 했다가 많은 시행착오만 했네요 ^~^

    디지털 활자미디어의 상품화에 대해 많은 고민과 깨달음을 얻는 시기를 보내고 있슴다.

    • BlogIcon buckshot | 2013/06/28 14:55 | PERMALINK | EDIT/DEL

      오랜만입니다~ 바쁘게 지내고 계신 것 같네요~

      그동안 얻으신 통찰을 블로그에 올려주심 참 좋을 것 같아요. ^^
      http://blog.naver.com/pupilpil

      고구마님께서 포스팅해주시면 많은 분들께 귀한 가르침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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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순간 :: 2013/06/14 00:04

사람들은 흔히 최고의 순간을 꿈꾼다. 최고의 순간, 과연 그게 뭘까? 내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외부에서 주입된 것을 나의 희망이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특별함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 그 특별함이 나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나를 도구화시키는 어떤 거대함을 신봉하고 있다면 그 특별함을 내가 얻었을 때 나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오랜 세월 동안 최고의 순간을 꿈꾸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는데 막상 그것을 얻었을 때 거대한 허망함이 쓰나미처럼 밀려오진 않을까? ^^

속물적 특별함에 대한 강박을 살짝 떨쳐 버리고 '나'를 중심에 놓고 오직 나만의 관점에서 최고의 순간을 정의해 보자. 남들이 인정하는 최고의 순간 말고 내가 나 혼자 즐겨라 할 수 있는 그런 순간 말이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영위하는데 에너지를 온통 소비하지 말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해 보자. 그건 정말 매혹적이고 짜릿한 도피가 될 것이다.

속물적 시선에서 비껴난 삶을 가정해 보면, 최고의 순간은 얼마든지 내 맘대로 정의할 수 있는 환경을 상정할 수 있겠다. 아침 출근 길에 문득 예전에 너무나 즐겨 들었던 멋진 노래 구절이 떠올라서 그걸 흥얼거린다고 생각해 보자. 바로 그 순간은 오늘 아침에 맞이한 최고의 순간일 수 있는 것이다. 나를 미소 짓게 하는 뭔가가 나의 뇌 속에 찾아와 나를 즐겁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나에겐 특별함 아니겠는가. 퇴근 길에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e-book을 읽다가 마음을 강하게 울리는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면, 그건 저녁 최고의 순간이 아니겠는가?

모든 사람은 일상 속을 살아간다. 일상은 특별함이 부재하는 시공간이다. 그저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1개월 전과 같은 지금, 지금과 같은 1개월 후, 뭐 이런 식으로 쳇바퀴를 굴려가면서 무심코 시간이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 일상에 대한 인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특별함'에 대한 강박이 낳은 환상일 뿐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를 온전히 타인의 시선에 맡기는 순간, 나의 인생은 자존이 아닌 타존의 삶이 된다. 타인의 시선이 이끄는 속에서 타인이 인정할 수 있는 특별함을 스토킹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일상 속에서 수시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순간들을 아무 것도 아니라 무시하게 되는데 바로 그 지점에서 일상의 피로가 발생하고 그런 피로가 누적되면서 자존은 더욱 약해지기 마련이다. 충분히 자존을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지속적으로 주어지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애써 부정하면서 오직 타인의 시선만을 바라보는 타존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삶. 안타까운 것이다.

일상이란 이름의 보석이 나의 발걸음을 방해하는 돌부리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어떤 하루에도 반드시 최고의 순간은 존재한다. 단, 그 감도의 높낮이가 있을 뿐이다. 매일 매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최고의 순간을 기억해보자. 감도의 높낮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일상 속에서 최고의 순간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최고의 순간이 나를 찾아왔을 때 그것을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말자.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고 그것과 대화를 해보자. 하루 중 최고의 순간을 알아보고 그것을 간직하고 수시로 그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 하루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차곡차곡 모이면 어느덧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행복이 된다.

일상은 피로가 쌓이는 시공간이 아니다. 최고의 순간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 보물찾기 시공간이며 그것을 찾았을 때의 희열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거나 설명해 줄 수 없기에 나 자신에게 더욱 소중한 그런 축복의 장이다. 일상 속에서 피로를 쌓아갈 것인가, 일상 속에서 수줍어 하면서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라는 최고의 순간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쌓아갈 것인가. 이는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자들의 선택과 결단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





PS. 관련 포스트
나를 찾아온 기적을 알아보는 것
현재는 행복이다.
바다가 읽어주는 나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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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화 도구, 언어 :: 2013/06/05 00:05

'단어'에 대한 재정의

배신을 받지 않으면 배신을 당하지 않는다.  마치 상대방이 나에게 선물을 주려고 할 때 내가 선물을 거절하면 선물을 받지 않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이다.  즉, 배신의 결정적 순간은 상대방이 나에게 배신을 제공했을 때 내가 그것을 받을 것인가, 받지 않을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어떤 쪽을 선택하느냐이다. 배신은 주는 쪽이 아닌 받는 쪽에서 유효성을 결정하게 되는 원리.

살아가면서..
나에게 선의를 가진 자를 만나게 될 수도 있고, 나에게 악의를 가진 자를 대할 수도 있다.

그런데..
가장 효율적이고 심플한 방법이 있다.

무조건 선의로 대하는 것이다.

나에게 선의를 가진 자에게 선의로 대하면 훈훈한 관계가 이어질 것이다. 나에게 악의를 가진 자에게 선의로 대하면 악의를 가진 자의 악의는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심지어, 그 악의가 나의 착각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어서 악의를 가진 듯한 자에겐 더더욱 선의로 대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아니, 대부분 착각에 의해 악의로 오인하는 것이지 나에게 대놓고 악의를 발송하는 자가 그리 많을 리가 없는 것 아닐까?  ^^

무조건, 집요하게 선의를 보내는 자에게 장사가 없는 것이다.  나에게 중립적인 스탠스를 갖고 있는 자는 서서히 나에게 호감을 갖게 될 것이고 나에게 악의를 갖고 있었던 자라도 나에 대한 스탠스를 변경하고 싶은 욕구가 서서히 작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악의에 악의로 대응하면 악의는 곱셈의 메커니즘으로 증폭된다. 하지만, 악의에 선의로 대응하면 악의는 희석되기 마련이고 결국은 선의가 악의를 압도하게 된다. 

악의도 선의도 부질 없는 흐름이다.  그런 건 언제나 흔들리게 마련이다. 뚜렷한 중심도 없이 부유하기 마련인 스탠스. 흔들리는 스탠스에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스탠스는 고정형 스탠스이다. 지속적인 선의의 메세지를 발신하는 스탠스는 일종의 중력이고 부유하는 스탠스는 그런 중력을 이겨내기 어렵다. 결국 세상은 중력의 법칙에 의해 운용된다. 누가 중력에 가깝게 플레이하는가? 중력의 메커니즘에 가장 가깝게 포지셔닝한 자가 가장 강력한 force를 발휘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황이다.

믿는 사람은 당하지 않는다.  믿지 않으니까 당하는 것이다. 끝까지 믿는 데에는 장사가 없다. 기대를 오프하고 믿는 것.일단 믿었으면 그것을 회수하지 말고 끝까지 유지하는 것. 믿을 수 있는 힘은 결국 인격의 크기와 비례한다. 안 믿어서 손해 보는 것이고 믿지 않아서 배신당하는 것이다.




'언어'는 결국 도구였던 것을..

믿음이란 단어의 정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자. 단어는, 언어는 결국 도구이다.  개인화 도구는 철저히 그것을 사용하는 자에게 용도가 정의되고 사용의 품질이 규정된다. 언어/단어에 사용하는 자의 세계관이 녹아 들어 있다. 각자의 세계관이 투영된 언어/단어라는 도구를 개인화 용도로 저마다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모습.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의 의미를 나만의 관점에서 전면 재검토하고 그것에 나의 세계관이 녹아 있는 의미를 새롭게 불어넣고 그것을 나만의 용도에 맞게 활용하는 것. 도구는 철저히 도구화시켜야 도구도 기뻐하지 않겠는가? 도구를 사용하면서 그것을 목적으로 숭상하면 도구도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




PS. 관련 포스트
물리학은 바벨탑을 쌓고 있는가?
생각의 파동, 언어의 파동
타인의 언어를 구사하기
담기와 담기기
언어의 이해
언어와 생각
언어 혁신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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