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모 포지셔닝 :: 2013/01/25 00:05

나는 부계/모계 순도 100% 탈모 집안에서 태어났다. 20대 후반부터 슬슬 탈모 조짐이 보이더니 30을 넘기면서 탈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30대 후반에 탈모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40을 넘긴 지금은 이마라인 붕괴, 위에서 내려다보면 머리가 거의 다 빠진 완전 대머리의 반열에 들어서고 말았다. 딸내미가 초등학교 2학년인데 딸내미 초등학교에 방문하기가 살짝 미안하다. 딸내미 친구들이 딸내미를 놀릴 것 같아서. "야, 넌 아빠가 안 오시고 왜 할아버지가 오셨니?" 딸내미 친구들이 집에 놀러와서 내가 아빠인 것을 알고 만만치 않게 놀라는 표정을 보인다. 누구든 십 수년간 매일 아침 머리카락 200개가 지속적으로 빠진 경험을 해보지 않은 자 내 앞에서 탈모를 논하면 안 된다. ^^

어제 5년 만에 만난 후배가 하는 말이 매우 인상적이다.
"형, 머리가 다 빠지진 않았네요. 그래도 좀 남았네요."

모지? 이거 덕담인가?

탈모인으로서 확실한 포지셔닝을 보여야 할 때인가?
두피 관리를 받기 시작해야 할까?
아님 가발을 알아봐야 할까?
그것도 아님 확실하게 밀어버릴까?

뭐 하나 쉬운 선택이 없군.
이제 뭔가 색깔을 드러낼 때가 되기도 한 것 같은데 말이다. ^^

포지셔닝을 확실하게 한다는 것. 취할 것을 분명히 취하고 버릴 것을 선명하게 버리는 것. 탈모에 있어서 나는 어떤 포지션을 취하는 것이 좋을까? 현재 어정쩡하게 얼마 안 남은 머리카락을 소중히 여기면서 한 올 한 올 보듬어가며 살아가고 싶다. 그냥 지금의 내 모습을 긍정하는 것이 내가 택할 수 있는 가장 떳떳한 포지션 아닐까? 여기서 뭔가 의미를 더하는 의도된 행위를 덧붙이는 것은 왠지 나답지 않은 느낌이다. 나는 탈모 집안에서 태어났고 탈모 계보를 확실하게 이어가고 있다. 나에게 주어진 DNA를 최대한 발현시키고 있는데 뭐가 그리 문제이겠는가? 내게 부여된 탈모 유전자가 잘 작동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잘 깔아주는 것. 그게 내가 취할 수 있는 플랫폼적 포지셔닝 아닐까? ^^



PS. 관련 포스트
탈모,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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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odge | 2013/01/25 08:56 | PERMALINK | EDIT/DEL | REPLY

    요즘 일상과 관련된 포스팅이 올라와서 더 친근하네요.
    읽으면서 후배분의 말을 보고, 얼마전 시선에 대한
    포스팅이 생각나서 다시 읽어봤습니다~
    프레임화된 후배의 시선에서부터 발생된 포스팅인것 같아 흥미롭네요~

    • BlogIcon buckshot | 2013/01/25 09:39 | PERMALINK | EDIT/DEL

      프레임화된 시선에 어떻게 창의적으로 대응할 것인지가 재미있는 놀이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유전자 인프라 제공자로서의 탈모 라이프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종종 글을 올려볼 생각입니다. ^^

  • BlogIcon Playing | 2013/01/28 15:13 | PERMALINK | EDIT/DEL | REPLY

    아~ 유사한 유전자를 제공받아 열심히 발현시키는 1 人 !
    이런 글을 쓰실 수 있다는 게 정말 감탄합니다

    아직 어린 입장에서는 도저히... 차마 발버둥치는 걸 멈출수가 없네요

    • BlogIcon buckshot | 2013/01/28 20:39 | PERMALINK | EDIT/DEL

      40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늙어보이는 것의 긍정적 측면에 대해서 많이 배우게 되어서 그런가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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