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알고리즘 :: 2009/04/20 00:00

상식 밖의 경제학
댄 애리얼리 지음, 장석훈 옮김/청림출판

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비교행동학자인 콘라드 로렌츠는 오리,거위,백조,기러기 같은 조류들이 부화 후에 가장 먼저 눈에 띈 대상을 어미로 인식하고 애착을 갖게 되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각인 현상 (imprinting)이라고 하고 그 특정한 시기를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라 한다.  금방 부화된 병아리는 어미 닭만을 졸졸 따라 다니며 그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처음으로 눈,귀,촉각으로 경험하게 된 대상을 부모로 생각하고 따라다니는 것. 뭐.. 가장 무난하고 안전한 스탠스라고 할 수 있겠다.

우연히 주변에서 접한 것을 바탕으로 최초의 결정을 내리고, 한번 내린 결정을 웬만해선 바꾸지 않고 고수하는 각인(imprinting) 현상은 인간에게도 통용된다고 한다.  '상식 밖의 경제학'의 저자 댄 애리얼리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인간도 첫인상/최초결정이 장기간 지속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행동 경제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앵커(anchor)라고 부른다.

책에서도 얘기하고 있지만, 나 자신도 스타벅스에 우연히 가게 되었을 때 엄청나게 비싼 커피 가격에 화들짝 놀라면서도 어리버리 분위기에 휩쓸려 카페라테를 주문하여 마시게 되었고, 다음 번에는 처음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스타벅스를 주문하게 되고 어느덧 스타벅스에 대한 구매결정을 위한 판단/고민을 그다지 하지 않고 계속 반복적으로 구매결정을 하게 되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 내려진 임의적인 결정이 별다른 논리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차기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현상.  임의적 결정을 앵커로 삼고 그것을 합리화시키고 싶어하는 알고리즘이 인간 뇌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일이다.  으찌 이리 단순무식하고 귀여울 수가 있단 말인가. ^^

생활하면서 크고 작은 판단과 결정을 무수히 내리게 된다.  '앵커' 현상에 대한 글을 보면서 갑자기 내가 최근에 내렸던 결정을 리뷰 해보니, 은근 앵커스러운 판단과 결정이 꽤 있는 것 같다. 첫 결정을 대충 내리고 그런 성의 없는 결정을 소중히 여기면서 다음 결정에 반영하는 깜찍한 행태를 나름 성실하게 지속하고 있는 것 같다. 에혀..

"인간은 절대적인 판단기준에 의해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일이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콕 집어 말하지 못한다. 그러다 어떤 상황이 조성되면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게 된다."  (by 댄 애리얼리)

사람은 비교에 익숙하다. 특히 알기 쉬운 비교에 익숙하다.  사람은 기준에 익숙하다. 알기 쉬운 기준에 익숙하다.  첫 결정 시에는 기준이 없어서 대충 결정한다. 그리고 두 번째 결정부터는 첫 번째 결정을 잣대 삼아 또 쉽게 결정한다. 중요한 결정을 머리 아프게 고민하지 않고 쉽게 결정하려는 귀차니즘 지향이 '앵커' 현상을 낳게 된 것 같다.  '비교, 알고리즘'에 이어 '앵커, 알고리즘'에서도 인간이 갖고 있는 비이성적 사고 패턴을 잘 이해하고 이를 반성/지양/실험/활용하는 재미의 기회를 발견하게 된 것 같다.  ^^





PS. 관련 포스트

비교,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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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토댁 | 2009/04/20 08:48 | PERMALINK | EDIT/DEL | REPLY

    매사 일상적인 일을 결정하면서도 판단 기준이 없으니 우왕좌왕하다 지나고 나서는
    이럴껄저럴껄하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을 가지게 되더라구요.
    불혹이라는 이 나이에도 갈팡질팡하니 기나긴 인생을 어이
    제대로 잘 런지...ㅋㅋ

    오늘 제 생일입니당,..
    생일날 우리 buckshot 님 덕에 인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당..^^

    즐거운 날되세요~~~

    • BlogIcon buckshot | 2009/04/20 09:31 | PERMALINK | EDIT/DEL

      아무래도 '불혹'의 정의를 바꿔야겠어요. 딱 곱하기 2만 해야겠어요.
      전 '불혹'을 80세로 정의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딱 맞을 것 같아요. ^^

      토댁님, 오늘 생일 정말 축하드립니다. 오늘이 생일이시면 저와 생년월일이 정말 가까우신 것 같습니다. 제가 3월8일인데.. ^^

      즐거운 하루 되시구요.
      토댁님은 365일을 생일처럼 보내시는 분입니다. 항상 부러워요~

  • BlogIcon Nul | 2009/04/20 10:21 | PERMALINK | EDIT/DEL | REPLY

    귀차니즘이 문제에요.
    저는 남들보다 더 그래서 질타를 많이 받습니다요......
    근데 이포스팅을 보니 인간의 뇌도 그냥 냅두면 참 게으른 녀석이군요

    "아~~ 귀찮은데 대충 결정하자~"
    "귀찮게 왜 자꾸 그래.... 저번에도 그랬으니 그냥 하던대로 하지!?!?"

    • BlogIcon buckshot | 2009/04/20 21:43 | PERMALINK | EDIT/DEL

      Nul님, 귀한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귀차니즘이 꽤 강한 편이라서 항상 애를 먹는 편입니다. 뇌를 살살 약 올리면서 살면 귀차니즘을 어느정도 컨트롤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댓글의 마지막 두 줄이 정말 촌철살인입니다. ^^

  • BlogIcon 고무풍선기린 | 2009/04/24 00:37 | PERMALINK | EDIT/DEL | REPLY

    앵커링을 통해 선택이 제한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있고 지내다가
    buckshot 님의 포스팅을 보고 겨우 책 내용을 떠올렸습니다.

    앵커링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간 생활을 떠올려 보면, 범인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만 알 수 있습니다. ^^;;

    • BlogIcon buckshot | 2009/04/24 09:53 | PERMALINK | EDIT/DEL

      고무풍선기린님 포스트에 2개 포스트를 트랙백하게 되네요~

      저도 앵커링에서 심하게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떻게든 앵커의 늪에서 벗어나보기 위해 이렇게 글을 올렸습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런 주제에 대해 포스팅해보려구여~ ^^

  • BlogIcon 덱스터 | 2009/04/25 14:15 | PERMALINK | EDIT/DEL | REPLY

    이게 다 뇌가 모든 정보를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하지 못한 탓이겠지요...

    뭐. 그래도 매번 도박하느라 고민하는것보다는 간단 간단하게 사는 것이 더 편해 보이기는 합니다 ^^;;;

    • BlogIcon buckshot | 2009/04/25 17:50 | PERMALINK | EDIT/DEL

      간단한 삶을 즐기면서도 가끔 뇌 마음대로 결정해 버리는 상황에 브레이크를 걸어 뇌에게 딴지를 거는 것도 꽤 유쾌한 경험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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