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알고리즘 :: 2009/10/12 00:02

지난 추석 연휴에 본가와 처가를 방문해서 모인 가족친지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는 와중에 충격적인 사실을 접했다.

6살인 딸 아이가 문자를 보낼 줄 안다는 것을 추석 연휴에야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이미 1~2개월 전에 딸아이는 문자질을 배웠고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 사촌들에게 문자를 보냈던 것이다.  나만 쏘옥 빼놓고.. ㅠ.ㅠ

딸아이한테 따지듯이 물어봤다. 왜 그 동안 나만 쏙 빼놓고 문자질했냐고.  딸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빠가 싫어서요."

욱..  딸아이에게 나는 이제 '싫은 아빠'로까지 자리매김되어지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점점 딸아이가 말을 잘 안 듣는 빈도가 잦아지면서 딸아이에게 싫은 소리를 너무 많이 해서 엄마 대비 비호감도가 점점 올라가는 것 같긴 했는데 상황이 생각보다 많이 안 좋은 것 같다..

집에서의 내 Identity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에서 '누워 있는 흑인 뿡뿡이 기계'로 포지셔닝할 때만 해도 그럭저럭 코믹 캐릭터로 인기를 쌓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불과 1년 만에 코믹형에서 비호감형으로 급전락한 셈인데..

집에서의 내 Identity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에피소드 1

집사람과 딸아이가 낮에 퀴즈게임을 했다고 한다. 딸아이가 동물에 대한 묘사를 하면 엄마가 그 동물이 무엇인지 맞추는 게임이었다. 사자, 코끼리, 뽀로로에 대한 설명을 딸아이가 멋들어지게 하고 엄마는 답을 다 맞추었다. 그리고 딸아이는 이런 문제를 냈다.

  • 딸: 얼굴에 모가 마니 나꾸요. 성은 최씨구요. 맨날 누워 있고 엄마 옆에서 방구를 뿡뿡 뀌어요.
  • 엄마: 아빠~
  • 딸: 와~ 맞았어요, 엄마 최고~

딸아이는 위 문제를 출제한 후에 기린, 강아지, 공룡을 묘사하면서 흥겨운 퀴즈 게임을 계속한다..  뭐야.. 난 딸아이 마음 속에서 동물들과 같은 클래스로 분류되고 있단 말인가?  하긴.. 딸아이가 묘사한 나의 행위는 동물들과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진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ㅠ.ㅠ


에피소드 2

집사람이 딸아이에게 신체의 여러 가지 차이를 다룬 '우리는 서로 달라요'란 책을 읽어주면서 이렇게 설명을 한다.  

  • 엄마: 딸아, 피부색이 하얀 사람은 백인이고 누르스름한 사람은 황인이고 까만 사람은 흑인이란다.
  • 딸: 엄마, 그럼 엄마는 황인이에요?
  • 엄마: 응, 맞아. 엄마는 황인이야. 지원이도 황인이고.
  • 딸: (거의 노타임으로) 그럼 아빠는 흑인이겠네요?
  • 엄마: ....
  • 엄마: 그래, 아빠 흑인 맞단다. ^^


얼굴색 까맣다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빠를 흑인으로 규정하는 딸아이..  그런 딸아이에게 나는 누구인가?  나의 아이덴티티(자아)가 흔들리고 있는 건가?



에피소드 3

집사람한테 목이 말라 마실 것 좀 달라고 하니 냉장고에서 요구르트를 꺼내서 건네준다. 마시려고 하는데 유효기간을 보니 1개월이 지난 상태다.

  • buckshot: 여보, 1개월이 지난 요구르트를 어떻게 먹으란 말이야?
  • 집사람: 그럼 그걸 딸아이 보고 먹으란 말이야?
  • buckshot: ...


뭐야, 딸아이 건강은 중요하고 내 건강은 건강도 아니란 건가?  나는 기계인가?



집사람이 내가 충격 받는 모습을 보고 딸아이에게 문자 보내라고 시켰는지 슬그머니 엄마 핸드폰을 통해 딸아이로부터 문자가 2회 도착했다.

아빠사랑해내가커
도아파도나는아빠
사랑해요
내가안좋
아하는거하지말고
사랑해요

아빠사랑해
내가커
서멋진사람돼게도
와주세요
사랑해요


음... 자기가 안 좋아하는 거 하지 말아달라고 한다.  내가 비호감 캐릭이란 얘기다.  '사랑해요'란 말이 여러 번 나오지만 다소 사무적인 느낌이 든다.  자기가 커서 멋진 사람 될 수 있게 도와달란 말이 맘에 걸린다. 정말 커서 좋은 사람 될 수 있게 도와줘야 할 텐데...

딸아이로부터 받은 문자를 통해 나는 딸아이가 아빠에 대해 갖고 있는 기대감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멋진 사람이 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그것이 내가 아빠로서 수행해야 하는 의무이자 특권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멋진 아빠가 되어야 하는데..  주위에 계신 멋진 아빠 역할 모델 분들로부터 많이 배워야 할 것 같다.  ^^



PS.

아빠로서 너무도 형편없는 나이지만 꿈은 크게 가지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최동석님의 포스트를 간직하려고 한다.  최동석님의 포스트를 읽고 눈물이 날 뻔 했다. 감동적이다. 

나도 언젠가 딸아이에게 최동석님과 같이 아래와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 될 것이다."

영국여행 이야기(20)_ 런던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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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엉뚱이 | 2009/10/12 14:27 | PERMALINK | EDIT/DEL | REPLY

    블로그 프로필 사진부터가 왠지 뿡뿡이 포스...에요. ^^
    사실은 저희 가족도 방구가족이랍니다.ㅎㅎ

    • BlogIcon buckshot | 2009/10/13 08:59 | PERMALINK | EDIT/DEL

      아~ 정말 반갑습니당~
      가스 방출의 쾌감과 뿌듯함을 잘 알고 계시겠네여~ ^^

  • BlogIcon NUL | 2009/10/12 14:58 | PERMALINK | EDIT/DEL | REPLY

    누워 있는 흑인 뿡뿡이 기계... 지금 제 포지션과 똑같네요....
    덕분에 앞으로의 제 위치가 예측되는군요.

    제 아이는 4살이니.... 2년간 상황을 뒤집을 뭔가를 해야할 듯....
    재밌고도 유익한(?) 포스팅이에요 ㅎㅎ. 엄청 웃었음 ㅎㅎ

    • BlogIcon buckshot | 2009/10/13 09:04 | PERMALINK | EDIT/DEL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바꾼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더라구요. 더군다나 그것이 생물학적 특성과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

  • BlogIcon 마파람(iOceo) | 2009/10/12 21:00 | PERMALINK | EDIT/DEL | REPLY

    유통기한 지난 음식을 먹어도 되는 흑인 뿡뿡이군요 ㅋㅋㅋ

    • BlogIcon buckshot | 2009/10/13 09:05 | PERMALINK | EDIT/DEL

      요즘은 왠만한 유통기한 지난 음식들은 알아서 가볍게 처리해 주는 센스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ㅠ.ㅠ ^^

    • BlogIcon cataka | 2009/10/14 00:35 | PERMALINK | EDIT/DEL

      짧게 정리해주신 마파람님께 감사...
      그리고 웃음을 주신 벅샷님꼐도 감사... ^^

    • BlogIcon buckshot | 2009/10/14 22:49 | PERMALINK | EDIT/DEL

      마파람님의 정리는 정말 촌철살인이십니다. ^^

  • BlogIcon inuit | 2009/10/12 23:48 | PERMALINK | EDIT/DEL | REPLY

    이런.. 벅샷님 위기일발! ^^
    귀여운 따님입니다. 하하

    • BlogIcon buckshot | 2009/10/13 09:05 | PERMALINK | EDIT/DEL

      점점 위기는 심화되어 가고,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고착화,악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

  • BlogIcon 최동석 | 2009/10/14 10:49 | PERMALINK | EDIT/DEL | REPLY

    아, 부럽습니다. 저는 딸아이의 투정을 받을 수 있는 시기가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저의 기억에는 그런 시간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아빠가 싫어서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살가움을 느끼면서 살았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러질 못했어요. 아쉽게도...

    저를 포함한 우리 시대의 많은 노동자들이 삭막하게 인생을 살았죠. 이제 가족끼리 그렇게 살가운 삶을 살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는데, 이미 아이들은 다 컸고, 부모곁을 떠났어요. 젠장~

    • BlogIcon buckshot | 2009/10/14 22:53 | PERMALINK | EDIT/DEL

      최동석님 말씀을 듣고 보니, 딸아이의 투정이 서러우면서도 귀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살가움'이란 것 못 느끼고 스쳐 지나갈 뻔 했습니다. ^^

      최동석님 포스트를 보면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강해졌습니다. 너무나 귀한 글 감사합니다...

  • BlogIcon ego2sm | 2009/10/14 18:05 | PERMALINK | EDIT/DEL | REPLY

    '누워 있는 흑인 뿡뿡이 기계'...
    아, 많이 웃었어요.
    벅샷님의 클래스 업그레이드를 기원해요...^,^

    • BlogIcon buckshot | 2009/10/14 22:54 | PERMALINK | EDIT/DEL

      에고이즘님께서 즐거우셨다니 저도 기쁘네여~ ^^ 클래스 업그레이드의 날은 언제 올지~ ^^

  • BlogIcon 토대 | 2009/10/15 09:33 | PERMALINK | EDIT/DEL | REPLY

    넘기게 발효된 요쿠르트를 드시고 장은 더 좋아지셨을듯...ㅋㅋ

    울쩡으니는 늘 속삭입니다.
    "엄마는 아빠랑 명석이 오빠랑 동석이 오빠만 좋아하재?"
    허거덕!!!
    오빠들에게는 온내지 않고 자기만 혼낸다는 것이지요..으그...
    저 넘 힘들어요.
    공주는 자기만 이뻐해 달라는군요..^^;;

    최동석님 글은 이따 밤에 다시 읽어볼꼐요,.
    일하러 갑니당 쌩~~~


    • BlogIcon buckshot | 2009/10/15 09:47 | PERMALINK | EDIT/DEL

      어제도 유통기한 지난 요구르트를 먹었습니다.
      방금 전에 화장실 가서 설사를 엄청 하고 왔습니다. ㅠ.ㅠ

      토댁님이 부러워요. 저는 애가 하나 밖에 없어서 애들이 같이 노는 모습을 볼 수가 없네요..

      최동석님 글은 밤에 읽으시다 눈물 흘리실 지도 모릅니다~

  • BlogIcon montreal florist | 2009/10/16 08:13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정말 너무 너무 재밌게 읽었네여, 빨랑 딸에 대한 아부모드로 진입하셔야 겠슴다. 그 다음은 불쌍모드, 아빠 참 불쌍해합니다.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저

    • BlogIcon buckshot | 2009/10/16 09:29 | PERMALINK | EDIT/DEL

      아.. 아부모드 진입에 이은 불쌍모드 전이.. 이게 아빠의 길인가요... ^^ ㅠ.ㅠ

  • Ohenry | 2009/12/10 17:15 | PERMALINK | EDIT/DEL | REPLY

    가끔 6살난 아들이 "몰랐었어? 아빠 으이그.." 할때가 있습니다. 사실 마트에서 자식이 사달라는 상품이 안보이는데로 돌아다니다가 실수로 눈에 띈 건데... 더 무서운 거는 그녀석도 아빠의 속마음을 이미 아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빠가 몰라서 그런거라고 생각하면 그녀석도 마음이 편해지나봐요..

    • BlogIcon buckshot | 2009/12/11 00:00 | PERMALINK | EDIT/DEL

      6살이 이렇게 무서운 나이인 줄은 예전에 미쳐 몰랐습니다. 이제 더 나이 먹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감당할지 감이 안 옵니당. ^^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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