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거시와 질투 :: 2013/11/15 00:05

예전에 쓴 글이 벽처럼 느껴질 때, 예전의 글과 당시의 나를 질투한다.

블로그에 포스트가 축적되면서 new post를 적는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이전에 적었던 생각과 중복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이전의 생각보다 진일보한 생각을 적어야 한다는 희망이 엮이면서 새로운 글을 적는 손가락의 흐름을 무겁게 만들곤 한다. 예전에 적은 글을 의식하면서 새 글을 적는다는 것이 살짝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

생각의 진도가 더디고 전보다 나아진 글을 적기가 힘들다고 느낄 때, 레거시를 차라리 미래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전환되는 것 같다. 시간의 흐름은 혁신을 레거시로 만들고 레거시는 박제화된 구속이 되어 생각의 진전을 방해하는 늪으로 작동하기 쉽다. 하지만 복잡다단하고 지루한 것으로만 여겨졌던 레거시를 일종의 미래라고 간주하는 순간, 시간의 흐름에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엔트로피의 방향성을 와해시키는 것이다. 레거시를 미래로 정의하고 나면 현재의 생각 정체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 가능해진다.

예전에 쓴 글이 벽처럼 느껴질 때, 예전의 글과 당시의 나를 미래라 여겨본다.

생각의 진전이 쉽지 않다는 건 레거시에 뭔가가 있다는 얘기다. 레거시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미래 그 자체일 수도 있다면 레거시를 벽으로 느낄 필요도 없고 레거시에 질투를 느낄 이유도 없다. 세상엔 대개 '아주 오래 된 미래'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시간의 흐름으로만 미래가 규정되진 않는다. 시간의 흐름 속에 뒤쳐진 것으로 보이는 것들 속에 오히려 미래가 존재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듯한 모습으로 계속 도래하고 있는 것이 실은 미래를 위장한 과거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예전에 쓴 글이 벽처럼 느껴질 때, 시간의 뒤틀림을 감지한다.

만물은 유동한다. 모든 것은 하염없이 흘러간다. 그런 상황 속에서 글을 적고 아카이빙한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행위다. 흐름의 연속선 상에서 자칫 균형감을 잃고 흐름 자체가 시간일 것이란 느낌으로 살아가면서 시간에 휩쓸리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 글을 쓰는 행위가 아닐까 싶다. 글을 적으면서 내 안에서 시간이 나만의 리듬에 맞게 재구성되고 예전에 적었던 글이 영원한 미래가 되고 지금 적고 있는 글이 덧없는 과거가 될 수 있다는 평범한 가르침을 체득할 수 있다는 게 참 좋다.

시간의 흐름을 내 스스로 디자인할 수 있을 때, 레거시와 질투는 미래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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