벡사시옹 :: 2014/01/27 00:07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의 '벡사시옹(Vexations)은 좀 황당하다. 악보는 달랑 한 페이지인데, '이 악보를 840번 반복하시오'란 지시가 악보에 적혀 있다. 지시대로 악보를 연주하려고 하면 무려 13시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13시간 이상이 걸린다니. 그런 음악을 듣고 있다고 상상만 해도 짜증이 난다. 난 음악에 대한 조예가 없어서 이 음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그냥 작곡가가 장난을 친 것 아닌가?란 개인적 의혹을 지울 길이 없다. ^^

그러나..
음악을 잘 모르는 나이지만, '벡사시옹'을 접하게 되면서 느끼는 바가 있긴 하다. 그냥 나의 관점에서 내 멋대로 적어보는 소감이라고나 할까..

'반복'은 사람을 짜증나게 하고 성가시게 하며 무기력하게 만든다. 뭔가를 무한에 가깝게 반복하는 것은 분명 정해진 틀 내에서 쳇바퀴를 도는 에너지 소모적 행위로 여겨진다. 그런데, '반복'이란 단어 자체에 함정이 있긴 하다. 같은 일을 되풀이 한다는 것. 우린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같은 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되풀이 한다는 것. 그게 인간에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반복'이란 단어 자체가 '버그' 아닐까? 불가능한 개념이 단어로 만들어져서 편의상 널리 유통되고, 그저 사용하기 편리한 단어라서 실상 그 단어가 허상에 가까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단어에 속고 또 속으면서 '반복'이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짝퉁처럼 체화시키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그건 환상일 것이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아니라 어제와 같은 오늘일 거라고 착각하는, 어제와 그닥 달라지지 않은 오늘의 나일 것이라고 오해하는 어설픈 관성이 '반복'이란 환상을 낳고 스스로 만들어낸 '반복' 환상 속에 갇혀 지내면서 스스로 지루함을 생성하고 자신이 만들어낸 지루함의 굴레를 답답해 하며 '반복'이란 환상을 기어이 실체로 만들어 버리고야 마는 의도치 않은 집요함.

벡사시옹 악보에 적혀진 가이드대로 13시간을 넘게 연주하는 동안 연주자는 어떤 연주를 하게 될까? 그건 연주자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 아닐까? 마찬가지로 벡사시옹과도 같은 악보를 반복하듯 연주하는 모습이 인간의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나에게 주어진 인생의 악보엔 벡사시옹보다 훨씬 더 잔혹한(?^^) 가이드가 적혀 있는 것이고 그 가이드를 어떤 자세로 수용하고 어떤 모습으로 연주할 것인지는 각 개인의 역량에 의해 퀄리티가 좌우되지 않을까?

벡사시옹 악보를 보면서 나에게 주어진 벡사시옹 악보를 마음 속에서 형상화시켜 본다. 난 나만의 벡사시옹 악보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으이그. 이 지겨운 연주를 어떻게 해야 하나?란 멍한 눈빛일까? 아님 오늘은 이 악보를 어떤 색깔로 연주할까를 기대하는 초롱초롱한 눈빛일까?

난 지금 벡사시옹을 연주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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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음,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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