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바보 :: 2013/05/17 00:07

10년 전이다..
점심 먹으러 식당에 갔다. 비빔밥을 시켰다. 비빔밥이 나왔다. 앞에 고추장인가 싶은 게 있어서 그걸로 비볐다. 그런데 이상하게 잘 비벼지지 않았다. 넘 뻑뻑했다. 그래도 열심히 비볐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비볐다. 그래서 한 그릇을 뚝딱 다 먹었다. 다 먹고 나서야 알았다. 그게 고추장이 아니라 설렁탕에 넣는 다대기였다는 것을..

최근이다.. (3월2일 토요일 저녁)
집사람이 냉장고에 포도주가 있다고 했다. 딸내미에게 포도주를 갖고 오라고 했다. 딸내미가 포도주를 갖고 왔다. 큰 통을 열었더니 포도주가 떡이 져 있어서 그걸 스푼으로 억지로 퍼내서 컵에 담은 다음, 그것에 물을 퍼서 휘저었는데 잘 휘저어지지가 않았다. 억지로 휘저어서 벌컥벌컥 넘겨 마셨다. 마시고 난 후에야 알았다. 그게 포도주가 아니라 딸기잼이었다는 것을..

10년 전과 최근 사이에도 이런 일화들은 무수히 많다. 쩝..

뭔가를 굳건히 믿고 (다대기를 고추장이라, 딸기잼을 포도주라)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의식을 수행하는 머저리 같은 나의 모습에서 나는 믿음의 힘을 느낀다. 뭔가를 강하게 믿을 때 뭔가로부터 파생되는 또 다른 뭔가에 대한 감각체계가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 감각체계의 전복을 통해서 나의 인지와 경험은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일상 생활에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면 곤란하겠지만 사유의 세계에선 이런 일을 얼마든지 겪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A를 A로만 여기고 생각을 하다 보니 생각의 홈이 특정 경로로만 너무 깊게 파여서 자칫 단조로운 사유 패턴에서 한 치의 일탈을 즐기는 것도 그리 쉽지 않으니 말이다. 가끔은, A를 완전히 다른 B로 믿고 B에 대한 생각의 결을 펼쳐나갈 수 있는 바보 머저리가 되고 싶다. ^^


PS.
사실, 3월2일 토요일 저녁의 해프닝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3월1일에 무심코 딸내미(10살)가 피아노학원에 가서 피아노 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근데 딸내미가 치는 피아노 솜씨가 의외로 괜찮았다. 별 기대 없이 갔다가 살짝 놀라버렸다. 아니 제법 많이 놀랐던 것 같다. 딸내미는 내일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는데 집에서 연습하면 시끄럽다고 항의가 들어오니 학원에서 파이널 연습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3월2일 토요일, 딸내미는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하러 갔고 나는 "설마 상이야 받겠어?"라는 생각을 하며 집에서 TV나 보고 빈둥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몇 시간 후에 딸내미한테서 전화가 왔다. 3학년 부문 대상을 받았다는 거다. 전체 참가인원이 거의 100명이었다고 한다. 완전 깜놀이었다. 갑자기 딸내미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고 대견스러움을 넘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부랴부랴 밖으로 나가서 딸내미에게 맛있는 저녁을 사주었고 급기야 스마트폰까지 사주게 된다. ㅠ.ㅠ  그리고 집에 와서 멍하니 널브러져 있다가 딸내미한테 포도주를 가져오라고 했고 딸내미는 포도주를 가져왔고 난 그것이 당연히 포도주라고 믿고 열심히 먹게 되었던 것이다. 그 날 저녁엔 딸내미가 무슨 말을 해도 난 다 믿었을 것 같다. 3월2일은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확실하게 학습을 했던 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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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ms sale

    Tracked from toms sale | 2013/06/13 10:48 | 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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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ms sh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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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The Black Ager | 2013/05/17 00:56 | PERMALINK | EDIT/DEL | REPLY

    헐... 메시지엔 공감하더라도 사례가 좀 심한 거 아닌가요? ㅋㅋㅋ 사물은 오감으로 느껴지니 저런 일이 아무한테나 자주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형태가 없는 개념의 경우에는 진짜 집단적으로 바보가 되는 일들도 많은 것 같아요. 그런 바보됨을 즐기고 천착해서 새로운 세계를 열든지, 나름의 분별력을 키우려고 노력하든지 본인 선택이겠죠. ^ ^

    • BlogIcon buckshot | 2013/05/17 15:15 | PERMALINK | EDIT/DEL

      예.. 아무리봐도 사례가 좀 심해요.. 너무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그래서 함 적어보았어요. 새로운 세계의 열림과 분별력의 견지는 백지 한 장의 차이인 것 같아요. 참 재미가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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