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자아 사이 :: 2008/10/3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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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를 예전에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난다.  전직 보험 수사관인 주인공이,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인해 10분 이상 기억을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 기억 상실증 환자가 되어 자신의 이름, 아내를 잃은 사실, 범인의 이름만을 기억한 채 범인을 추적한다는 얘기다. 주인공은 기억을 지속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항상 메모를 하면서 파편화된 기억의 조각들을 힘겹게 이어가게 된다. 자신이 묵은 호텔, 방문한 장소, 만난 사람과 그에 대한 정보 등을 항상 메모하게 되고 심지어 몸에 문신까지 하게 된다. 주인공은 휘발성 메모리를 복구하고 구조화하기 위해 항상 퍼즐게임의 늪에 빠져 있고 그의 주위를 맴도는 사람들은 어느 사람 하나 신뢰가 가지 않는다.  그런 상황 속에서 기억은 변조되고 도데체 무슨 기억이 진짜인지 가물가물해지면서 당초 확실하다고 믿었던 기억마저도 흔들리는 총체적 자아 위기를 맞게 된다.  이 영화를 보고 평상시에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기억이란 단어에 대해 강한 환기를 하게 되었던 경험이 또렷이 기억난다.

기억이 파편화되면 자아(아이덴티티)가 흔들린다. 사람은 기억을 통해 자신에 대한 정보를 차곡차곡 시간축을 따라 저장하고 구조화하고 변조한다.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 사람에게 자아 의식을 부여한다. 나는 내가 갖고 있는 기억의 합이라고 할 수 있다.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에 이런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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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공간을 3차원 좌표축으로 놓고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물체는 3차원 공간 속의 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시간마저 하나의 차원으로 간주하면 시공간을 4차원으로 볼 수 있고 모든 시공간 상의 이벤트를 4차원 좌표계 상의 한 점으로 규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시간은 공간과 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시간이 흐른다는 표현이 있듯이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계속 진행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인식된다. 시간은 과연 흐르는 것일까?

물질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파편적 입자들을 묶어 주는 인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자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파편적 경험들을 묶어 주는 기억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기억이 없다면 사람은 자신을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를 잃어 버린다. 사람은 기억을 토대로 자신에 대한 자아 의식을 강화시킨다. 기억은 과거를 데이터베이스화해서 무의식과 의식 체계 속에 저장하고 현재에 대응하고 미래를 예측한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은 '자아'가 헷갈리지 않는 확연한 실재감을 갖고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자기 조작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존재하기 위해 기억이 필요하고 기억이 데이터베이스 조작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시간이 흘러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자아라는 개념이 희박해지면 기억이 의미 없게 되고 기억이 의미 없다면 과거,현재,미래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자리에 존재하게 된다.  3차원 공간 속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걍 4차원 시공간 전체를 한 방에 느끼며 살게 되는 것이다.  과거가 무의식 속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듯이 미래도 무의식 속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을 수 있다. 단지 저장되는 양태가 다를 뿐이겠다.  기억과 자아 사이엔 악어와 악어새가 공유하는 공생의 집착이 존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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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acked from ego + ing | 2008/10/31 02:27 | DEL

    그것은 하나의 신체를 공유하고 있는 기억의 집합이다. 기억이 없다면,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내가 서로 동일인물이라고 주장 할 수 있는 근거는 사라진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삶의 문맥, 생..

  • BlogIcon egoing | 2008/10/31 02:26 | PERMALINK | EDIT/DEL | REPLY

    너무 심오해서 제가 따라온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
    반가운 포스팅이내요.
    커뮤니케이션 없이 무엇인가를 공감한다는 것은 참 신기한 체험입니다.

    • BlogIcon buckshot | 2008/10/31 09:09 | PERMALINK | EDIT/DEL

      egoing님의 사유가 담긴 egoing님의 포스트를 통해 배우면서 적은 글입니다. 저 혼자 생각으론 저 이런 스타일의 글은 절대 못 씁니다. 앞으로도 계속 egoing님의 도움을 받을 생각입니다. ^^

  • BlogIcon 구월산 | 2008/10/31 05:54 | PERMALINK | EDIT/DEL | REPLY

    시간과 자아...
    상대성이론을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꿈은 인간의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하던데..꿈속에서 나타나는 상징들은 주로 과거이지만,
    시간적으로 배열되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인데..자아가 우리의 의식이고,그 의식은 작은 영역의 무의식이 외면화된 형태라고 했을 때 무의식의 세계에서 시간은 어떤 의미일까요?

    • BlogIcon buckshot | 2008/10/31 09:15 | PERMALINK | EDIT/DEL

      결국 시간은 인간의 오감 한계가 지배하는 일상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뿐, 어쩌면 시간은 아무것도 아닌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분리,경계,다름을 통해 자아가 형성되고 발전을 하게 되는데 필요 이상으로 자아가 넘 심하게 발전할 경우 여러가지 왜곡을 하게 될 것 같고요.. 그 왜곡의 대표적인 현상이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냥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을 한계 투성이인 인간이 임의로 나누고 그걸 절대화시켜서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런 왜곡스런 발전 본능이 없는 무의식의 세계라면 시간은 완전 다른 의미로 재구성될 것 같구요..

      그냥 가벼운 넋두리구요. 앞으로 생각을 계속 해봐야 할 주제인 것 같습니다. 귀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

  • BlogIcon mepay | 2008/10/31 09:03 | PERMALINK | EDIT/DEL | REPLY

    벅샷님 저희 유전자 검사 한번 받아보는게 어떻겠습니까?
    샴 쌍둥이도 이런 샴 쌍둥이가..-_-;

    • BlogIcon buckshot | 2008/10/31 09:16 | PERMALINK | EDIT/DEL

      놀라운 일이 넘 자주 발생하면 그것도 일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우찌 이런 일이... ^^

      정말 검사 한 번 받아봐야겠는데요? ^^

    • BlogIcon 토마토새댁 | 2008/10/31 22:38 | PERMALINK | EDIT/DEL

      악!!! 또~~~~

      음 정말 정밀검사가 필요한 듯...
      이상혀~~아마 39번 유전자가 똑 같을껴...ㅋㅋ

    • BlogIcon buckshot | 2008/10/31 22:45 | PERMALINK | EDIT/DEL

      정말 충분히 경악할 만한 일이에여~ ^^

  • BlogIcon SuJae | 2008/10/31 11:41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저는 보다 나은 자아 실현을 위해 애써 기억을 조작하기도 합니다 ㅎ

    • BlogIcon buckshot | 2008/10/31 18:59 | PERMALINK | EDIT/DEL

      저도 가끔 하는데.. ^^
      앞으로 그 빈도를 좀 늘려볼까 생각 중입니당~ ^^

    • BlogIcon egoing | 2008/11/02 23:01 | PERMALINK | EDIT/DEL

      그 스킬을 좀 공개해주시면 어떨런지. 몹시 궁금하내요.

    • BlogIcon buckshot | 2008/11/02 23:13 | PERMALINK | EDIT/DEL

      저도 SuJae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전, 아주 저급한 수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뚜렷한 기억은 조작이 쉽지 않으니 일단 열외를 시키구요. 흐릿한 기억들이 있습니다. 특히 약한 자아, 맘에 들지 않는 자아와 관련된 기억들이 흐릿하게 남아 있으면 그걸 지우고 대신 강한 자아, 맘에 드는 가공의 자아를 생성/발전시킨다고나 할까.. ^^

    • BlogIcon SuJae | 2008/11/03 00:23 | PERMALINK | EDIT/DEL

      가장 간편한 방법은, 그동안 잘해오던 일이 잘 안풀릴때, 난 원래 이 일을 잘하지 못했었어...라던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아무런 기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릴때 소질이 있었던 것처럼 최면을...;;;

  • BlogIcon 데굴대굴 | 2008/11/02 11:18 | PERMALINK | EDIT/DEL | REPLY

    그렇다면 조작된 기억은... 어떤 효과가 나는걸까요? ;;

    • BlogIcon buckshot | 2008/11/02 14:07 | PERMALINK | EDIT/DEL

      자아가 느낄 수 밖에 없는 원초적 불안감을 완화시켜주는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기억의 합이 자아이고 자아가 존재감을 강화하기 위해선 필요에 의해 얼마든지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조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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