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 알고리즘 :: 2009/06/24 00:04

부제: 벅샷 고해성사 (대흠님께서 정의해 주심 ^^)


딸아이는 2004년생이다. 딸아이가 갓난아이일 때, 딸아이는 늦게 자고 새벽에 시도 때도 없이 깨어나곤 했다.  재우는 것도 일이었고 새벽에 깨어나는 아이를 달래서 재우는 것도 큰 일이었다.  그런데 새벽에 앙앙 울어대는 딸아이를 깨우는 사람은 결코 내가 아니었다. 항상 아내가 일어나서 아기를 깨웠다. 난 정말 못난 남편/아빠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리더십과 자기기만
아빈저연구소 지음, 차동옥.서상태 옮김/위즈덤아카데미


'리더십과 자기기만'이란 책을 읽었다.  그 책엔 '자기 배반'이란 개념이 나온다. 작동 방식은 아래와 같다.  요거 나름 심플하고 통찰력 있는 진단이다.

1.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반하는 행위를 '자기 배반'이라 한다. 
2. 나 자신을 배반했을 때, 나는 나의 자기배반을 정당화시키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3. 내가 스스로 정당화시킨 세상을 바라볼 때, 나의 현실 감각은 왜곡된다.
4. 그래서 내가 나 자신을 배반할 때, 나는 상자 안에 들어간다.  그러면서 자기 기만에 빠지게 된다.
5. 상자 안에 있음으로써 나는 다른 사람들이 상자 안에 들어가도록 유도한다.
6. 우리는 상호 학대를 정당화/강화하면서 상자 안에 머무를 이유를 서로에게 제공하는 일에 공모한다.


아래 흐름도는 2004년의 내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나는 분명 새벽 단잠을 깨우는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었고 그 울음소리에 아내가 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일어나서 아기를 깨우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결국 그것을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그건 '자기 배반'이었다.  그리고 자기 배반을 한 이후부터는 그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나와 아내에 대한 왜곡된 관점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난 가정의 안녕을 위해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가장이었고 좋은 아빠/남편이 되기 위해선 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새벽에 잠을 설치면 안 되는 사람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또한, 그런 나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아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은연 중에 가지게 되었던 기억이 난다. 





어리버리 자기 배반을 하고 나서 그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관점을 왜곡시키는 행위는 앵커, 알고리즘과 맥이 닿는다. 우연/임의적으로 내려진 결정이 계속 유지되는 앵커 현상은 자기 배반 행위를 강화시키는데 분명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인간은 정당화의 귀재이다.

끊임 없이 자기 배반을 하고, 자기 배반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나에 대한, 타인에 대한 관점을 왜곡하고, 그러는 과정 속에서 현실감각이 떨어지고, 그것이 또 다른 자기 배반을 낳고..  이게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렌즈를 통해 세상과 타인을 바라본다. 렌즈는 가치관, 관점, 성격 등을 의미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identity)'가 나의 관점을 결정한다.  물론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타인의 렌즈를 통해 나는 관찰을 당하고 판단을 당하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2개의 렌즈가 존재하게 된다. 렌즈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 중의 하나가 자기 배반과 자기 배반 정당화에 의한 왜곡된 현실 인식이다.  결국,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건 내가 가진 렌즈이다.  결국 사람과 사람 간 관계의 변화는 나의 변화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identity)의 변화는 내 안에 입력된 자기 배반 알고리즘의 굴레에서 얼마나 슬기롭게 벗어날 수 있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내 렌즈를 굴절시키는 '자기 배반' 사례가 너무 많아서 리스트업하기 민망할 정도인데 이제부턴 자기 배반을 강화하지 않고 자기 배반을 배반하는 놀이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배반의 배반, 그것이 Self-Leadership의  시작이다. ^^



PS. 관련 포스트
렌즈의 원칙, 고통의 원칙 -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 (Winning With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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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엉뚱이 | 2009/06/24 09:29 | PERMALINK | EDIT/DEL | REPLY

    예시로 든 '잠자는 아내를 위하지 않은 자기배반'의 사례를 보니 이해가 팍팍 되네요. 저도 그 동안 그리고 지금도 자기배반의 삶을 살고 있는 듯 합니다. ㅜㅜ;;

    • BlogIcon buckshot | 2009/06/24 09:32 | PERMALINK | EDIT/DEL

      전..
      자기배반의 대가입니다.

      이런 분야에는 대가가 되면 안되는데.. 걱정입니다. 이렇게 포스팅도 하고 반성도 하고 정기적으로 점검도 해보면서 조금씩 나아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zoom | 2009/06/24 09:55 | PERMALINK | EDIT/DEL | REPLY

    자기 배반을 위한 배반놀이라?.....
    어찌보면 여태해온 놀이(게임)중에서
    가장 하이레벨 놀이인것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BlogIcon buckshot | 2009/06/24 11:53 | PERMALINK | EDIT/DEL

      잼있는 놀이 개발하는 것이 제 취미입니다. 요 놀인 쉽진 않지만 보람이 가득할 것 같습니다. ^^

  • BlogIcon 대흠 | 2009/06/24 11:47 | PERMALINK | EDIT/DEL | REPLY

    벅샷님의 고해성사군요. ^^

    • BlogIcon buckshot | 2009/06/24 11:53 | PERMALINK | EDIT/DEL

      대흠님께서 금번 포스트의 '부제'를 정해주셨네요. 바로 반영했습니다~ ^^

    • BlogIcon 대흠 | 2009/06/24 19:20 | PERMALINK | EDIT/DEL

      저를 Read&Lead의 보조로 채용하신 겁니다.^^

    • BlogIcon buckshot | 2009/06/24 19:27 | PERMALINK | EDIT/DEL

      하하하~ 대흠님 유머감각 넘 멋지세요~
      저도 대흠님과 같은 풍요로운 유머감각을 지니고 싶습니다. ^^

  • BlogIcon 최동석 | 2009/06/24 22:03 | PERMALINK | EDIT/DEL | REPLY

    이 책을 읽고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반성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리뷰 감사합니다.

    • BlogIcon buckshot | 2009/06/25 09:11 | PERMALINK | EDIT/DEL

      최동석님은 이미 자기배반을 배반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습니다. 가장 어려운 주제가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귀한 댓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 삐질 | 2009/06/25 09:43 | PERMALINK | EDIT/DEL | REPLY

    늘 주제에 대해서 명료하게 정리된 포스팅 잘 보고 있습니다 :) 그중에서도 오늘 buckshot님의 '자기배반' 이라는 주제는 마음을 푹푹 찌르네요. 이미 상자에 들어가 포장까지 잘 마쳐진 상태라는걸 알면서도 그걸 뚫고 나오기가 이토록 힘든게 인간인가봅니다 (아이고)

    • BlogIcon buckshot | 2009/06/26 05:57 | PERMALINK | EDIT/DEL

      정말 상자 안에 갇히면 나오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인간의 굴레인가봐요. 그 한계를 조금이라도 잘 넘기 위해서 블로깅을 지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계를 자각하고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행동을 하기 위해.. 귀한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

  • BlogIcon 격물치지 | 2009/06/28 21:21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제 사무실 책상에 '남에게 관대하자. 나에게 가혹하자'라고 크게 썼는데... 항상 반대로 됩니다. ^^

  • 외계소년 | 2009/06/29 16:59 | PERMALINK | EDIT/DEL | REPLY

    와우 이 개념 정말 도움이 많이 됩니다. 조금 소름도 돗내요. 이렇게 상자안에 갖힌 삶 정말 무서운거 같아요. 항상 자신을 객관화 하고 자기 정당화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해야겠어요. 잘못한점에 대해 부끄러워할줄 알아야겠어요. 글이 너무 좋아서 저기 위에 6가지 나열해놓은 알고리즘을 제 미니홈피에 옮겨적어보내요. 출처도 남겨놓았어요. 혹시 안된다면 삭제하겠습니다. 글 감사합니다.

    • BlogIcon buckshot | 2009/06/29 20:36 | PERMALINK | EDIT/DEL

      외계소년님, 댓글 주시고 인용까지 해주셔서 넘 감사합니다. 부족한 글이 도움이 되셨다니 큰 힘이 생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 BlogIcon kirke | 2009/06/29 23:20 | PERMALINK | EDIT/DEL | REPLY

    어흑~
    벅샷님~!

    논외의 질문입니다만, 위와같은 순서도를 만드실 때 어떤 툴을 사용하시나요?
    jpg파일로 아주 깔끔하고 아주 눈에 잘 들어오는게 사용해보고 싶네요.

    답변부탁드려요^^*

    • BlogIcon buckshot | 2009/06/30 07:18 | PERMALINK | EDIT/DEL

      아.. 그거 툴을 쓰는 것은 아니구요. 그냥 파워포인트로 그린 겁니다. 한 번 그려 놓으면 템플릿처럼 계속 쓸 수 있어서 좋습니다. ^^

  • BlogIcon 고무풍선기린 | 2009/07/09 09:51 | PERMALINK | EDIT/DEL | REPLY

    자기 배반을 통한 상황 정당화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모순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모순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성인군자라 이야기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앵커링과 비교하신 부분에서는 저는 약간 생각이 다릅니다.
    앵커링은 선택할 수 있는 선택해야만 하는 것들을
    줄여주는 것에서 기인하는 편의성에 기인하는데 비해
    말씀하신 자기 배반은 자신의 선택에 있어
    윤리성을 판단하는데 있어 보입니다.

    편의성과 윤리성 어쩌고 했지만,
    적어 놓고 보니까 결국은 같은 귀결입니다. ^^;;

    • BlogIcon buckshot | 2009/07/09 09:57 | PERMALINK | EDIT/DEL

      예, 고무풍선기린님 말씀처럼 자기배반은 윤리성 이슈와 연결고리가 강한 것 같습니다. 제가 원체 이것저것 같다 붙이고 연결하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간혹 무리수를 둘 때도 많은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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