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뇌: 인간은 미리 설계된 정교한 프로그램에 의해 통제/운영되는 호르몬의 화학적 생성/유영 플랫폼인 것인가? :: 2008/06/13 00:03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현실이라는 건 도데체 무엇인가? 그걸 어떻게 정의하나?
만약 자네가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는 것을 말한다면
그건 단지 자네 뇌가 해석하는 전기적 신호에 불과하다네.

'행복의 공식'이란 책을 읽고 나서 위 대화가 떠올랐다.

행복의 공식
슈테판 클라인 지음,
김영옥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뇌는 컴퓨터처럼 생명 없이 뻣뻣하고 건조한 기관이 아니라 축축하고 엄청 출렁거리는 살아 있는 기관이다. 피와 물은 차치하고라도 60종에 달하는 호르몬들이 뇌 안에서 회전하고 있다. 이 호르몬들은 우리가 행동하고 느끼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뇌는 흐른다..


약간의 화학물질이 우리의 정서와 행동을 바꿀 정도로 우리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평소에 별로 말이 없던 사람이 와인을 원샷하고 갑자기 달변으로 돌변하는 경우는 알코올이 흐르는 뇌에 영향을 주고 있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아래는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주요 호르몬들의 활약상이다. 아직 이들의 작동 메커니즘이 확실히 밝혀진 상태는 아니지만 인간의 뇌 속에 흐르는 호르몬들이 인간의 욕망과 감정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선 개괄적으론 알아 볼 수 있는 상황이다.  

      • 도파민은 22개의 원자로 이뤄진 아주 미세한 분자이다. 도파민의 주성분은 물,탄소,산소,질소이다. 도파민 분자는 뇌에서 팔방미인처럼 활약하면서 우리의 정신이 깨어 있도록 조절하고 주의력을 관장한다. 또한 호기심과 배우는 능력, 판타지와 창조력 그리고 섹스에의 욕망을 관장한다. 한마디로 도파민은 욕망의 물질인 것이다.
      • 도파민은 단순히 흥분을 자극하는 것뿐 아니라 그러한 자극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필요한 체계틀을 가동시킨다. 우리는 도파민의 영향력 하에 동기 부여를 느끼고, 사태를 낙천적으로 판단하여, 자신감에 차서 목적을 추구하게 된다. 도파민은 결심한 것을 행동에 옮기도록 뇌를 움직인다.
      • 호르몬들의 기능 방식에 대해서는 최근 폭발적으로 연구가 이뤄지고 있어, 거의 매일 새로운 결과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도파민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학자들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도파민이 흥분과 욕망에 영향을 끼치는 유일한 호르몬은 아닌 것 같지만 도파민은 분명 이 모든 과정의 중심에 서 있다. 말하자면 도파민은 욕망의 화학적 주 개폐기인 셈이다.  
      • 뇌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면 뉴런들 사이에 변화가 온다. 도파민은 뇌에 새로운 연결망이 생기도록 촉진한다. 도파민은 유전 정보들이 신경세포에서 처리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치고, 이로써 뉴런들이 새롭게 형성될 수 있도록 자극한다. 따라서 욕망과 배움의 과정은 아주 밀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쾌락은 명민함을 동반하며, 쾌락이 없는 배움의 과정은 힘겹기만 할 뿐이다.
      • 자연적으로든, 병적으로든 또는 약물에 의해서든 도파민의 과도한 분비가 없었다면 많은 예술가들은 결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사노바는 모험만 즐긴 사람이 아니라 뛰어난 저술가이기도 했다. 올리버 색스의 환자 레너드는 인공적으로 제조된 엘도파에 의해 뇌 속에 갑자기 과도한 양의 도파민이 분비되었을 때 미친 듯이 자서전을 집필하였다. 장 폴 사르트르 역시 그의 마지막 책 몇 권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창조의 도취 속에서 집필했다. 프랑스의 이 철학자는 노년에 점점 더 시력을 잃게 되자 마지막 남은 시력과 경주를 벌이고자 암페타민을 복용했다. 이것은 도파민의 수치를 높여주는 약물이었다.  
      • 1973년 세 그룹의 학자들은 우리 뇌 속에 있는 뉴런들이 모르핀이나 헤로인과 같은 화학적 아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체, 즉 접속 장소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자들은 뇌가 모르핀과 유사한 그리고 비밀에 싸인 수용체들에 정확히 들어맞는 물질들을 생산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신체 고유의 아편물들이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유기체 스스로가 생산해내는 약물들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엔돌핀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안'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접두사 '엔도'와 '모르핀'을 합성해서 만들어낸 이름이었다. 뒤이어 엔케팔린, 다이노르핀이 발견되었다. 엔돌핀과 엔케팔린은 좋은 감정을 생산하고 다이노르핀은 혐오의 감정을 생산해 낸다. 인간의 뇌는 그 효과 면에서 아편을 훨씬 능가하는 물질인 베타-엔톨핀을 아주 자연스런 방식으로 만들어낸다. 간뇌에 있는 가는 선인 뇌하수체가 바로 이 뛰어난 효과를 지닌 물질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 인간이 향락을 누릴 때는 의식적인 감각적 인지를 책임지고 있는 대뇌 일부가 활동적이 된다. 그리고 이 때 봉사하는 호르몬은 아편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신체 고유의 중독성 화학물질인 오피오이드이다.  엔돌핀,엔케팔린,다이노르핀은 모두 오피오이드라는 개념으로 묶여 있다. 오피오이드는 소위 뉴로펩티드, 즉 신경아미노산 결합물로서 쾌락 물질인 도파민보다 훨씬 더 크고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는 분자이다.
      • 오피오이드를 인간의 뇌에서 발견한 이후 학자들이 향락 전달체들을 다른 동물들에게서도 발견하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피오이드는 개나 설치류 그리고 곤충들의 뇌에서도 흐른다. 지렁이 같이 단순한 뇌 구조를 가지고 있는 생물체에서도 그것들이 발견되었다. 자연 전체가 행복의 추구에 휩싸여 있다는 말인가?
      • 조깅하는 사람들의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는 관용적 표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영어로 이 최고의 기분을 러너스 하이 (runner's high)라고 한다. 몸이 지치기 시작할 때 뇌는 엔돌핀과 엔케팔린을 방출하여 유기체가 몸의 고단함을 극복하고 계속해서 달릴 수 있게 도와준다. 도취감은 지친 느낌을 잊게 만들고 더욱 힘을 내서 달리게 만든다.  
      • 여성들이 출산의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것도 몸에서 방출되는 아편 덕분이다. 막 분만을 끝낸 후 산모들의 얼굴에 떠오르는 저 느슨한 행복감은 오피오이드의 효과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추를 즐겨 먹는 것은 입에서 불이 나는 것처럼 매운 맛에 뒤따르는 오피오이드-도취감을 즐기기 위해서라는 추측도 해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행복의 공식을 읽고 나서 위에 예시한 '매트릭스'의 대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프랜시스 크릭의 '놀라운 가설'이 떠오른다.  즉, 사람은 매사에 자기 의지대로 결정했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기 설정된 두뇌 알고리즘의 계산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사람이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이유는 두뇌 알고리즘의 과정을 기억하지 못하고 계산의 결과만을 기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두뇌가 자신의 사고 프로세스를 관찰하지 못하고 사고 프로세스의 결과만 챙긴다는 것은 인간이 로봇처럼 자신의 머릿속 알고리즘을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는데 불과한데도 마치 그것을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거라 착각한다는...

이는 작년 9월에 올린 Communication as a platform - 간접성과 확장성이 강한 침투력을 낳는다.  포스트와 맥이 닿는 얘기다. 영속성을 추구하는 유전자가 인간의 행동 하나 하나를 통제하긴 힘드니까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가능성들에 대처하기 위한 규칙과 충고를 프로그램 형태로 만들어 인간을 간접적으로 통제한다는..


인간은 미리 설계된 정교한 프로그램에 의해 통제/운영되는
호르몬의 화학적 생성/유영 플랫폼인 것인가?



인간이 느끼는 고차원적 감정이 사실은 호르몬의 화학반응의 결과이고 이의 메커니즘만 정확히 인지하면 인위적인 조작을 통한 정교한 재현이 가능하다는..  행복이란 감정도 결국 화학반응의 결과이고 이 반응에 대한 이해와 통제가 가능할 거라는..

인간만이 느낄지도 모르는 의식이 결국 물질에서 창발한 놀라운 생물학적 현상이라면 인간이야말로 최고의 복잡계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뇌에서 방출되는 호르몬은 인간 감정에 영향을 미치지만, 인간은 호르몬의 영향력을 관찰하고 이를 어떻게 컨트롤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 쉽진 않을 것이다. 너무나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어 온 진화의 역사가 인간이 자신의 감정과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메커니즘을 스스로/의식적으로 관찰하고 통제하는 걸 막아왔기 때문에.. 

인문/과학적으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멀고도 험한 길인 것 같다.  그래도 매력적인 길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



PS. 관련 포스트: Reach & Rich - 행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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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뇌과학으로 풀어보는 감정의 비밀

    Tracked from Inuit Blogged | 2008/11/23 23:36 | DEL

    양심은 인간에 깃든 신성(神性)이다. -톨스토이 마음, 감정 더 나아가 양심과 영혼 등 형이상학적 상위 개념은 인간을 인간답게 합니다. 좋든 나쁘든 존재 자체가 인간의 증명이기도 합니다. ..

  • Tuna | 2008/06/15 08:17 | PERMALINK | EDIT/DEL | REPLY

    와우! 흥미롭네요. 프란시스의 가설은 무척이나 생뚱맞지만 또한 무척이나 개연성이 있는 듯...

  • BlogIcon 인광인샘 | 2008/06/17 10:05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듯 호르몬이란게 육체를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윤활성을 돕는 기름과 같은 단지 촉매역활이라면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겠네요ㅋ
    혼이란 것도 과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요? 참 어렵습니다.. 허허.. ^^;
    좋은 글 감사합니다~ ^^

    • BlogIcon buckshot | 2008/06/17 13:18 | PERMALINK | EDIT/DEL

      요즘 '생물과 무생물 사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요. 생명이란 무엇인가?란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과학적 탐색/성찰이 멋지게 펼쳐지는 책입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인광인생님의 댓글을 읽으니 더 느낌이 새롭네요. 과학적인 관찰/분석/해석이 새로운 이해와 통찰로 이어지는 기쁨을 앞으로 많이 맛보고 싶습니다. ^^

  • BlogIcon inuit | 2008/11/23 23:38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저도 마지막 말씀처럼 뇌를 이해하는게 인간을 이해하는 길이란 점에서 요즘 많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트랙백 고맙습니다. 글 잘 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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