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을 읽자 :: 2012/12/14 00:04

인간은 패턴의 집합체이다. 타고난 패턴이든 성장하는 과정에서 습득한 패턴이든 인간은 패턴에 의해 사고하고 행동한다. 특정한 패턴은 특정한 시나리오를 내포하기 마련인데, 패턴에 의해 사고/행동하는 인간은 대본을 따라 연기하는 배우와 같은 셈이다.

나를 구성하고 규정하는 패턴이 존재하고 내가 기계적으로 사고/행동할 수 있게 미리 짜여진 대본이 존재한다는 것. 나에게 대본이 주어지고 그것을 기계적으로 따라 읽고 따라 생각하고 따라 행동한다는 것.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생각과 행동을 리뷰해 보자. 나의 생각/행동이 어떻게 흘러왔는가를 돌이켜 본다면 나에게 주어진 대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닥 거부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평생 앵무새처럼 암기하고 따라 읽고 행동해야 할 대본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도대체 그 대본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한 번 쭉 읽어 보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대본을 차분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묵묵히 읽어보는 사람은 그닥 많지 않을 것이다. 아마 대본의 존재조차 잘 인지하지 못한 채 시시각각 자신에게 닥쳐 오는 상황의 흐름 속을 자신의 의지(?^^)대로 헤쳐 나간다고 착각하며 사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일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대본을 읽는다는 건, 나를 구성하고 규정해 왔던 패턴의 실체를 직시하는 것이다. 나의 패턴을 읽기 위해서는 다양한 가상 케이스를 설정하고 그것에 내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예상하면 된다. 인간의 뇌는 매번 복잡한 사고를 전개하지 않기 위해서 캐쉬(cache) 시스템을 운영한다. 미리 내장된 반응 기제에 의해 사고/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무의식적으로 나도 모르게 행해지는 캐쉬 기반의 생각과 행동들이 나의 의지를 앞서간다는 사실. 나는 나이기 보다는 캐쉬 시스템에, 패턴 체계에 입력된 알고리즘에 의해 철저히 조종되는 로봇 배우에 불과한 것이다. ^^

배우는 대본을 읽어야 하는데 '나'라는 로봇 배우는 대본도 잘 읽지 않는다. 대본을 잘 읽지 않으니 내가 해야 하는 연기가 대체 무엇이고 나는 어떤 연기파 배우이고 나의 연기 커리어는 어떻게 쌓여왔고 앞으로 어떻게 쌓여갈 것인가에 대해서도 감이 별로 없다. 이게 패턴에 의해 움직이고 캐쉬에 의해 흘러가는 인간 배우의 실체가 아닐까?

나를 규정하는 대본이 무엇인지 이제부터라도 알아가는 노력을 해보자. 나를 로봇과도 같은 반응 기제 속으로 휘몰아 넣는 고도의 패턴 대본의 실체를 직시하고 그 대본에 적혀 있는 나의 사고/행동 알고리즘을 분석해 보자. 그것을 리버스 엔지니어링할 수 있어야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견지해야 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방향성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조종하는 대본을 읽지 않고서 나는 나를 극복할 수 없다.


인간은 패턴의 집합체이고 패턴으로 꽉 짜여진 대본을 묵묵히 수행하는 로봇 연기자이다. 로봇이 로봇된 자신을 돌아볼 때 자신을 규정한 대본을, 자신을 구속하는 패턴을 뛰어넘을 수 있는 단계 점핑을 할 수 있다. 언제까지 대본도 읽지 않는 단순 로봇으로 살아갈 것인가?  평생 로봇 배우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하더라도 자신을 기술한 대본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는 조금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내 옆에 나를 규정하는 대본이 있다. 이제 그것을 손에 들고 차분한 마음으로 읽어보자. 아무리 바쁘고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내 옆에 있는 '나' 대본만큼 중요하고 급하진 않을 것이다. ^^





PS. 관련 포스트

패턴과 아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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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Playing | 2012/12/29 23:35 | PERMALINK | EDIT/DEL | REPLY

    안녕하세요 ~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말씀하신 내용을 조금 비틀면 어찌보면 그 시대를 반영한 문화가 건강하면 자신을 속박한 굴레를 인지할 수 있고, 건강이 매우 부실하면 아무 성찰없이 사는 거 같아요

    예를 들어 신분제도를 사회적으로 강제하던 100년전인 1910년대쯤에 내 삶이 신분제도로 억압된 '연기인생'이었음을 자각할려면 어찌해야할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생각을 하는 무언가의 새로운 자극이나 놀라운 경험이 먼저 있어야한 건 아닐까 싶은데요. 이것이 먼저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냥 자신만 돌아본다고 되진 않을꺼 같아요
    철저한 여론조작으로 주위 사람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높으신 귀한 분이나 하늘같은 나라님에서 강제적으로 신분제도를 당연한 것처럼 행동하고, 지식인은 다른 문화에서 접했던 이야기나 깨닭음을 전달하기 보다 사회폐단에 의한 이익을 대대손손 누리는데 만족하고 있다면?

    아무튼 신분제도가 어떻게 그 오랜세월 이어졌는지 이해 못했는데... 사람보다 돈이 앞서는 세상을 지금 그냥 받아들이는 현재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그 각본을 왜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신분제도가 한반도만 따지도 최소 몇
    천년이상 이어왔죠. 고작 100년전만 해도 그렇고, 끔직한 다른 나라의 침공에 의한 엄청난 수난을 겪으며 매우 어설프게 신분제도에서 또 다른 '억압'으로 변형되었을 뿐 어김없이 진행중이라고 봅니다.

    추신)
    몇 십명 백혈병 걸리면서 사망하는데 그 공장에서 위험하다는 정보는 철저히
    차단한 체 몇 명이 죽든 말든 과학자들에게 입증을 늦추는 연구를 엄청난 지원금으로 진행하고 시간끌다가 사람들 죽으면 법정에서 유족들과 합의하는 식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버는 게 지금 벌어지는 일이라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 BlogIcon buckshot | 2012/12/30 19:10 | PERMALINK | EDIT/DEL

      말씀하신 것처럼 외부 환경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밖에 없고 외부 환경에 압도당하는 상황이 심하면 심할수록 개인의 자각과 성찰은 매우 난해해질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성찰은 어느 시대를 사는 사람에게나 필요한 덕목인 것 같습니다. 물론 시대적 배경을 잘 타고난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 비해 지극히 유리한 조건에 놓이게 되겠지만요.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은 시대에 따라서도 다르고 동시대에서도 천차만별이겠고 어떤 상황에서든 자각과 성찰을 위한 시간을 자신에게 허용하는가 아닌가는 각 개인의 결단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내주신 댓글에 대해서는 계속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귀한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

    • BlogIcon The Black Ager | 2013/01/01 17:08 | PERMALINK | EDIT/DEL

      제가 볼 때는 '대본 이해'라는 테제란 단순히 개인의 자아 발견과 같은 성공학적 영역보다, 한 세대가 살아남을 것이냐 하는 사활적 차원에서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떤 제도가 우리를 억압한다고 말하기 이전에, 그것이 성립하기 위한 무장 집단과 그들 간의 공고한 연대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인류에게는 상시 존재하는 위협입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 종족'에 필요한 것은 리더가 아니라 그리스도들이고, 그래서 극단적으로 들리겠지만, 진짜 깨어있는 이들에게 정치적 의사표현이라는 건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벅샷님이 한국 진보좌파 계열의 트위터를 팔로우하시면서도 본인 스스로는 블로그에 대통령 이름 한 번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작가 활동에 있어 비이념적 포지션을 유지하고 계신 것도 이런 코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아무튼, 자신을 구속하는 패턴을 객체화시켜 돌아본다, 이건 윤리적 덕목이 아니라 존재론적 시나리오라는 게 제 입장입니다. 그 영화가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는 큰 '시대님'이 이끌고 계신 거겠죠. 시대는 그런 개개인과 항상 동행하면서 자기만의 블루프린트를 은밀하게 실현해나갈 것입니다. 벅샷님과 R&L 독자 여러분, 모두 행복한 한 해 되세요. ^^

    • BlogIcon buckshot | 2013/01/01 17:13 | PERMALINK | EDIT/DEL

      자신을 구속하는 패턴을 객체화시켜 돌아본다. 존재론적 시나리오..

      글을 적은 의도를 멋진 표현으로 생동시켜 주시니 그저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항상 보내주시는 댓글이 제겐 그 어떤 책보다도 그 어떤 구루의 강연보다는 귀중한 가르침으로 다가옵니다. 항상 감사하구요. 행복한 새해 맞으시기 바랍니다. ^^

  • BlogIcon Playing | 2013/01/01 18:23 | PERMALINK | EDIT/DEL | REPLY

    예 귀한 댓글 잘 봤습니다
    'The Black Ager' 댓글도 마찬가지고, 좀 생각을 정리해봐야할 꺼 같아요

    그래도 삶을 몸소 앞장서서 헌신적으로 가는 이름없는 그들이 있기에 정신차리고 의식적으로 '대본'을 넘어서기 위해 모두 힘냅시다~!

    • BlogIcon buckshot | 2013/01/01 19:00 | PERMALINK | EDIT/DEL

      앞으로는 대본 좀 많이 읽어보고 대본 의존도를 낮춰보려 합니다. Playing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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